영화 ‘국제시장’이 관객 1400만명을 돌파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부터 현재까지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의 얘기에 관객들은 웃음과 눈물로 공감했다.
국제시장은 한국전쟁 당시 피란민 1만4000명을 미국 수송선에 태우고 탈출시킨 ‘흥남부두 철수 작전’의 생생한 모습으로 시작된다.
주인공 덕수가 아버지, 여동생과 이별하게 되는 흥남부두 철수 신은 영화의 명장면 중 한 대목이다. 전후세대에게는 민족상잔의 비극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케 한 장면이었다.
이 특별한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28세의 젊은의사가 있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50년 12월. 당시 전세를 역전시켜 북한까지 치고 올라갔던 한미연합군은 예상치 못한 중국의 개입으로 급박하게 철수에 돌입했다.
함경남도 흥남부두에는 중공군을 피해 남한으로 가려는 10만 명의 피란민들이 모여들었지만 군인 중심의 철수작전에 민간인들을 포함시킨다는 것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이 때 이들을 구하기 위해 한 의사가 나섰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생이자 당시 미 10군단 고문관으로 근무하던 현봉학 박사(1922~2007)였다.
현봉학 박사는 알몬드(Edward M. Alomd) 사령관에게 민간인 철수를 간곡하게 요청했다.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던 사령관은 거듭된 설득으로 마음을 돌렸다.
마침내 사령관이 군수물자를 포기하면서 민간인 수송을 결정하고, 혼란과 공포에 떨던 함경도민들은 군 수송선을 타고 흥남을 떠나 거제도로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현봉학 박사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수 많은 생명을 구한 ‘한국의 쉰들러’이기에 앞서 훌륭한 임상병리학자이기도 해다.
그는 한국전쟁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뮐렌버그병원과 뉴저지 주립의과대학에 자리를 잡은 후 그곳에서 정년을 맞았다.
뮐렌버그병원에서는 그의 업적을 인정해 그가 정년퇴임한 1988년 새롭게 전산화된 임상병리학 연구실을 ‘현봉학 임상병리교실’이라고 명명했다.
현 박사는 자신을 ‘한국의 쉰들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오히려 가슴깊게 반성했다.
“한국전쟁 당시 흥남에서 10만 명의 피란민 탈출을 도왔지만 나는 적어도 100만 명의 이산가족을 만든 장본인이나 다름없다.”
혹시 자신이 이산가족을 만들어 그들의 삶을 망가트린 것은 아닌지 천착했던 것이다. 나아가 그는 이산가족 재상봉과 재결합을 일생의 과업으로 여겼다.
1985년 설립된 미중 한인우호협회나 1991년 창설된 국제고려학회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이유도 이러한 결심과 무관치 않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통일을 보지 못한 채 2007년 11월 25일 자신의 반생을 보냈던 미국 뮐렌버그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