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이었다. 개념 조차 생소했던 ‘디지털병원’이라는 개원 슬로건에 병원계는 술렁였다. 챠트와 필름, 전표, 종이가 없는 ‘4 Less(Chartless, Filmless, Slipless, Paperless)’를 기치로 한 디지털병원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최초의 시도였다. ‘혁신’이 ‘확신’으로 바뀌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과감한 시도를 단행한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은 단숨에 병원 정보화 선도모델로 자리매김했고, 빠른 속도로 의료서비스 패러다임 변화를 주도해 나갔다. 분당서울대병원의 ‘압축 성장’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사실 분당서울대병원 성공을 예측한 이는 많지 않았다. ‘분원’이라는 한계에 부딪쳐 고전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선제적인 의료정보시스템 구축을 통해 의료환경 변화를 정확히 읽어냈고, 이후 젊고 혁신적인 병원으로 굳건한 입지를 다져나갔다. 그렇게 당찬 걸음을 내딛은지 벌써 20년. 분당서울대병원은 이제 그동안 쌓은 혁신의 내공을 바탕으로 또 한 번의 새로운 행보를 예고하고 있다.
디지털, 의료 패러다임 바꾸다
분당서울대병원의 비약성 성장 기저에는 선도적인 의료IT 시스템이 자리한다. 2003년 개원 당시 신생병원 이점을 살려 세계적으로 유례없던 전자의무기록을 선보였다.
이후 10년이 흐른 2013년 신관을 오픈하면서 250억원의 예산을 투입해 차세대 의료정보시스템 ‘Bestcare 2.0’을 개발했다.
전자의무기록이 질적으로 우수한 진료를 가능하게 해준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기에 과감한 투자가 가능했다.
실제 병원정보시스템과 표준진료지침(Critical Pathway, CP)을 연동해 뇌졸중·심근경색 등 촌각을 다투는 치료의 신속성을 높였다.
임상의사결정지원시스템(CDSS, Clinical Desision Support System)에 입력된 수 백개의 체크로직이 국제 기준에 부합하는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예를 들어 항생제 관리 프로그램을 통해 적정 처방률이 획기적으로 개선되고, 이에 따라 감염관리팀의 협진을 요청하는 사례가 감소되는 등 실제 입원환자 치료의 효율성을 높였다.
이 외에도 백신 관리 시스템, 신장 투약 시스템, 급성 신장 손상 예측 시스템 등 수 많은 임상의사결정지원시스템을 통해 진료의 효율을 제고할 수 있었다.
입원환자 생체 징후의 이상을 감지하는 신속 대응 시스템, 특정 검사결과 이상을 실시간으로 의료진에게 통보하는 시스템 등은 병원 서비스 패러다임을 바꾼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교육과 연구 기능 강화를 위해 빅데이터 분석 시스템이 의료정보시스템 내부에 연동돼 연구자들의 연구 활동을 돕고 있다.
복잡한 정보를 취합해 적절한 의사결정을 적시에 해야 하는 의료현장에서 정보화는 종이로 하던 일을 컴퓨터로 하는 것 이상의 성과를 가져 온 것이다.
국산 의료정보시스템, 전세계를 호령하다
분당서울대학교병원이 공들여 개발한 의료정보시스템은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 중동, 일본 등 세계로 수출하며 소프트웨어 강국으로서 ‘K-medicine’ 위상을 높이고 있다.
첫 수출은 중동에서 시작했다.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수출 계약을 맺고 수도 리야드와 대표 관광지 알아흐사 등에 위치한 왕립병원 8곳에 의료정보시스템을 구축했다.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에 위치한 클레멘소병원 역시 ‘Bestcare 2.0’을 사용하고 있고, 현재 중동 여러 국가들로부터 상담이 진행 중이다.
의료IT 최대 시장이자 본고장인 미국도 분당서울대병원의 의료정보시스템에 주목했다.
미국 전역 14개 병원을 거느린 오로라병원 그룹의 통합 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를 수주하며 미국시장 진출을 본격적으로 알렸다.
2017년 8월 캘리포니아 소재 차터오크병원, 2018년 비스타델마병원과 네바다 소재 리노병원 등 현재까지 총 8개 병원에 한국산 의료정보시스템을 이식했다.
최근에는 한국산 제품이나 소프트웨어의 진입장벽이 높은 일본에도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현재까지 ‘Bestcare’ 누적 수출액은 1억2240만 달러에 이른다.
분당서울대병원의 ‘Bestcare 2.0’은 여러 평가에서도 그 혁신성과 우수성을 입증시켰다.
‘Bestcare 2.0’은 지난 2010년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보건의료정보관리시스템협회(HIMSS, Healthcare Information and Management Systems Society)의 인증을 받았다.
또한 2016년에 이어 2020년까지 3연속 7단계 인증을 받는 대기록을 세우며 국산 의료정보시스템이 세계 무대에서 통한다는 사실을 당당히 입증해 냈다.
진료현장 곳곳에 투영된 첨단기술, 환자 만족도 제고 기여
분당서울대병원은 이러한 IT 역량을 발휘해 첨단 수술실도 개소했다.
의사가 음성으로 조명 등 수술실 환경을 조정하고 병원 내 검사실부터 해외 병원까지 어디든 실시간으로 영상 및 통신이 가능한 스마트 수술실이다.
이 수술실에는 기존 4K 수술내시경과 수술 시야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3D 수술내시경을 동시에 지원하는 디스플레이가 구축돼 있다.
4K 화질의 3D 영상이나 360° 카메라를 이용한 8K VR영상 등을 제작할 수 있는 장비와 함께 수술 생중계 기능 등 첨단 병원의 명성에 걸맞는 시설이 갖춰져 있다.
특히 지난 2021년에는 이 수술방에서 아시아 각국 흉부외과 의료진 200여 명을 대상으로 메타버스 기술을 활용한 교육이 진행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당시는 코로나19로 전세계 의료진의 대면 학술교류에 제약이 있었던 만큼 교육 참가자들은 수술실에 직접 참관하는 듯한 첨단기술에 상당한 만족감을 나타냈다.
분당서울대병원의 디지털 역량은 국가 공중보건 위기에서도 빛을 발했다. 병원은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에서 생활치료센터 입소자들의 건강을 살필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별도 어플을 통해 입소자들의 증상, 체온, 맥박, 호흡 등을 병원 모니터링 본부에서 관리하는 이 시스템은 생활치료센터 모범사례로 인정돼 수도권 전역으로 확대되기도 했다.
또한 최근에는 의료 인프라가 취약한 지역의 응급의료 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원격 중환자실 모니터링 및 협진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여러 병원의 응급실은 물론 숙련된 당직의사를 확보하기 어려운 지역의료원 응급실과도 전산, 영상 등을 실시간으로 연결해 비대면으로 협진을 제공하는 시스템이다.
송정한 병원장은 “원격 회진 시스템, 인공지능 병상 예측 시스템 등 다양한 첨단기술을 임상현장에 적용하고 있다”며 “IT 역량을 더욱 발전시켜 최고 의료를 구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