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양보혜기자/기획 3]중국산 발사르탄 고혈압약 파동을 계기로 ‘의약품 위탁제조’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했다.
상당수 제약사들이 별도의 생산라인 확충이 필요한 품목이거나 이미 같은 성분의 제네릭을 생산 중인 위탁업체에 생동성 시험부터 판매에 이르는 전(全) 과정을 위탁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통해 제약사들은 R&D나 파이프라인 확충에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 신약개발과 같은 핵심 업무에 주력할 여력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의약품 생산대행업체(CMO) 등 위탁업체들이 늘면서 경쟁이 치열해지자, 가격 경쟁력 확보를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이나 인도에서 들여온 값싼 원료로 의약품을 만드는 일이 부지기수다. 발사르탄 사건과 같은 문제가 생겼을 때 의약품 생산 및 관리에 대한 책임 소재를 명확히 따지기 어렵다는 점도 논란거리다.
실제 정부는 제약사에, 제약사는 하청을 준 위탁업체에, 위탁업체는 원료수입업체에 책임을 떠넘기는 기막힌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제약사 10곳 중 1~2곳만 직접 생동성시험”
발사르탄 파동의 주요 원인으로 ‘위탁제조’가 지목되고 있다. 위탁제조 범위는 공동·위탁 생동성시험, 제조 등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포함된다.
이중 ‘공동·위탁 생동성시험’은 발사르탄 사건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지만, 생동성시험 규제가 느슨해지면서 제네릭이 난립하게 됐다는 데 많은 전문가들이 공감한다.
식약처에 따르면 생동성 인정 품목은 2010년 437개에서 2016년 1112개로 급증했다. 위탁생동성 시험으로 생동 인정을 받은 품목이 2012년에는 337개, 직접 실시 품목 251개로 집계됐지만, 2016년에는 위탁생동 허가 품목이 984개, 직접 실시 품목이 128개로 차이가 극명했다.
1112개 제품 중 984개가 위탁 생동을 거친 것으로, 제네릭 10개 중 1~2개만 제약사가 직접 생동성시험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약사들이 공동·위탁 생동을 선택하는 이유는 비용 대비 효과가 커 경제성이 높기 때문이다. 실제 우리나라 발사르탄제제 품목은 다른 국가와 비교하면 비정상적으로 많다.
식약처가 발표한 문제가 된 발사르탄 성분 품목은 전체 76개사 174개이지만 동일 품목이 캐나다 21개, 미국 10개, 영국은 5개 있다.
고혈압약뿐만 아니라 발기부전치료제인 ‘비아그라’는 46개사 116개가 복제약으로 허가를 받아 판매되고 있다. 경쟁약인 ‘시알리스’도 69개사 185개 품목이 출시됐다.
이형기 서울대병원 교수는 “공동·위탁 생동성시험을 거친 제약사가 판매 허가를 받기 전까지는 양질의 고가 원료를 사용하다가 허가 이후에는 품질 보장이 어려운 저가 원료로 갈아타는 경우도 있다”며 “판매 허가 후에는 원료 공급처를 바꾸더라도 간단한 비교 용출 자료만 제출하면 되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공동·위탁 생동, 사건 터지면 책임 회피 가능”
공동·위탁 생동성 시험은 제네릭 난립 외에도 의약품에 하자가 생겼을 때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실제 판매 중지 조치를 받은 의약품을 보유한 제약사 가운데 매출 상위 10위권 내 포함되는 대형제약사 1곳도 위탁생산 업체에서 맡긴 품목으로 인해 입방아에 올랐다.
이 제약사는 수탁업체(CMO)에 제네릭 생동성시험 및 생산, 품질관리, 유통까지 모두 맡겼다고 한다.
CMO는 원료 수입업체로부터 공급받은 중국산 원료를 가지고, 같은 성분의 제네릭 제품에 대한 생동성 시험을 진행했던 임상시험위탁업체(CRO)에 위탁 생동성시험을 맡겼다. 쉽게 말하면 하청에 재하청을 준 셈이다.
그러나 해당 의약품에 암을 유발하는 물질이 포함돼 있다는 식약처의 발표 이후 환자를 포함한 모든 관련 기관들이 해당 제약사에 책임을 추궁했다고 한다.
A제약사 관계자는 “사실 우리는 회사명과 상품명만 제공했을 뿐인데 식약처의 중국산 발사르탄 의약품 판매조치 중단 목록 공개 이후 부도덕한 기업으로 몰렸다”며 “일부 약 복용 환자는 책임이나 피해 보상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발사르탄 사태가 마무리된 후 피해 규모 등을 집계해 해당 업체에 손해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는 쪽으로 논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복지부 vs 제약사, ‘책임 소재’ 갈등
복잡다단한 제조 및 유통구조가 중국산 발사르탄 고혈압약 사태 수습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책임 소재를 따지는 일이 본격화되면서 한 차례 큰 갈등이 예상된다.
제조사와 제약사, 유통업체와 제약사, 제약사와 정부, 제약사와 약국 및 병원 간 릴레이 소송전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실제 정부가 발암 유발물질 고혈압약 사태와 관련해서 책임을 제약사에 묻겠다며 포문을 열었다. 이에 대해 제약업계는 “무책임한 처사”라고 성토했다.
복지부는 최근 열린 건정심에서 문제가 된 의약품 재처방 및 조제 등으로 발생한 피해규모를 조사해 제약사를 상대로 구상권 또는 손해배상을 청구한다는 안(案)을 보고했다. 건보공단은 이미 식약처에 자료 검토를 요청했다.
곽명섭 보건복지부 보험약제과장은 “요양급여 부분에 대해선 재정적 부담은 없다”며 “다만 이번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면 지출되지 않았을 부분에 대한 손해배상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곽 과장은 이어 “제약사가 판매한 약에 대해 생긴 문제임에도 제약사에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 상황”이라며 “제약사도 어떻게 책임질지에 대한 안을 내놓지 않으므로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제약업계는 보건당국이 제시한 가이드라인에 따라 허가를 받은 의약품을 판매했는데, 예측이 불가능한 사건으로 인한 피해보상을 전적으로 제약사에 돌리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판매 중지 조치를 받은 한 제약사 관계자는 “미국 FDA나 유럽 EMA도 중국 제약사가 자발적으로 그 사실을 알리고 나서야 의약품 회수 조치를 진행했다”며 “원료의약품에 대한 시험기준이 없는데 무엇을 근거로 책임을 묻는다는 건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지키지 않은 의무가 무엇인지, 그 의무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규정이 전무한데 희생양으로 몰리고 있다”고 토로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내분비내과 A교수도 “제약사가 잘못한 부분도 있지만 의약품 허가 및 관리 책임을 가진 복지부나 식약처가 제 역할을 못한 부분도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곽명섭 과장은 “구상권 청구는 건보법 제58조를 근거로 이뤄지는 것”이라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상황은 너무한 것 아닌가. N-니트로소디메틸아민 관련 기준에 대한 검토, 추가재원이 나간 부분에 대한 피해 규모 등을 따져 제약사에 책임을 묻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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