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못채우고 떠나는 지방의료원장들
김천·서산·대구·경기 이어 인천·속초도 진행, '출자·출연법, 합법적 해임 도구 작용'
2015.04.02 18:12 댓글쓰기

전국 지방의료원장들의 사퇴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연말 경북 김천을 시작으로 서산, 대구, 경기도까지 벌써 4명 째다. 사퇴의 변은 모두 “일신상의 이유”로 입을 맞춘 듯 동일하지만 속사정은 따로 있다. 


사실 지방의료원장의 ‘고무줄 임기’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노조와의 갈등 및 정치적 성향 등으로 인해 물러나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모 지방의료원장은 “서산, 김천과 같은 특수한 경우를 빼고는 도의 압박에 못 이겨 등 떠밀려 떠나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면서 지자체장의 산하기관장 해임 권한을 명시한 ‘출자·출연법’이 만들어지면서 앞으로 그 빈도가 잦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정치입문·직원 자살 파문으로 자진 사퇴 김천·서산의료원장


김천의료원 김영일 前 원장은 지난해 12월 말 공식 사퇴했다. 임기를 6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그의 사직 소식은 지방의료원장 몇 명만 알고 있을 뿐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다. 노조와의 갈등이나 방만 경영에 대한 여론의 질타 등 전조현상도 없었다.


오히려 공공의료기관의 모범 사례로 꼽히며 전국 38개 공공병원 중 26개 기관이 벤치마킹을 하기 위해 다녀간다는 소식뿐이었다. 심지어 지자체 공무원도 경영 혁신 방법을 배우러 김천의료원을 찾았다.


A 지방의료원장은 “그의 정치 이력을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경희대 치대 교수 출신의 NGO 활동가였던 김영일 前 원장은 지난 2008년 현 김관영 경상북도 지사에게 발탁돼 1년 4개월여 간 정무부지사직을 수행했다. 


이후 2010년 6·2 지방선거 구미시장 출마 의사를 밝히며 사퇴했으나 돌연 2009년 6월 김천의료원장으로 임명됐다. 지난 2002년에도 그는 구미시장 출마 후보로 거론된 바 있다.


이 같은 이력 때문에 지방의료원장들 사이에서 그는 “언젠가는 정치를 할 사람”으로 통했다. 이에 지방의료원의 모범으로 언론의 조명을 받는 시점에 명예롭게 원장직을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하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서산의료원 前 신효철 원장은 산하 노인병원 직원의 자살 사건 이후 의료원을 떠났다.


서산의료원 직원 C모씨는 지난 1월 초 결재 책임자인 원장에 대한 불만과, 공보의 수당 부정 지급 문제를 제기한 유서를 남기고 목숨을 끊었다.


신효철 前원장은 C씨 장례식 이후 이 문제로 일주일간 도 특별 감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도 관계자는 “유서 상에 나타난 개연성만 갖고 직원 자살 원인이 원장 책임이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며 "다만 행정적인 문제에 대한 부분은 개선 필요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지난 1월 26일 사표를 제출했고 이틀 뒤 공식 수리됐다. 도 관계자는 “개인적인 이유에서 사표를 제출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최근 벌어진 일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B지방의료원장은 “이 일로 신 前 원장이 지병을 얻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던 것 같다”고 전했다.

 

“타의가 더 강하게 작용” 대구·경기도의료원


대구의료원 안문영 前 원장과, 경기도의료원 배기수 前 원장도 표면상으로는 자발적인 사퇴다. 하지만 자의(自意)보다 타의(他意)가 더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안문영 前 원장은 지난해 12월 16일 임기 1년여를 남겨놓고 돌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그는 “일신상의 이유”라고 피력했지만 한 달 전에 대대적으로 단행된 도 특별 감사가 원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대구시는 지난해 10월 감사인력 11명을 투입, 경영 효율성 및 회계처리, 조직·인력 운용에 대한 대대적인 특정 감사를 실시한 바 있다. 간호사 수급 문제로 호스피스 병동 운영을 중지하는 과정에서 인권침해 주장이 제기됐고, 공공의료 축소 의혹이 불거지면서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된데 따른 것이다.


해당 감사 결과는 안문영 前원장이 사퇴 의사를 밝힌 날로부터 일주일 뒤 공개됐다. 대구시는 경영 전반의 총체적 문제점을 지적하며 “의료원의 위법·부당 사항 35건을 적발했고 관련자 44명에 대한 문책을 요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B지방의료원장은 “대구시가 온갖 이유를 다 만들어 모종의 압박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직원들이 줄줄이 문책을 당하니 의료원장으로서 책임지지 않고는 못 버텼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대구시 관계자는 “감사 결과가 나와 공개를 한 것 뿐”이라고 일축했다. 대구의료원 관계자도 “원장님 사퇴는 감사건과는 무관하다"며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그만 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의혹은 잦아드는 듯 했다. 그러나 후임 원장으로 권영진 시장의 측근으로 알려진 신창규 원장이 임명되면서 도의 압박설에 무게가 실렸다. 자기 사람을 앉히기 위해 안문영 원장을 물러나게 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신창규 원장은 지난 2012년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대구 수성갑 공천을 신청한 바 있다.


하지만 신창규 원장은 “권영진 시장을 본 적도 없다. 정치색이 있는 것이 아니라 대구에서 정치하려면 새누리당 아니면 안 되는 것이 현실”이라고 반박했다.


경기도의료원 前 배기수 원장은 ‘지방자치단체 출자·출연 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른 첫 해임 사례로 기록될 뻔 했다.


이 법에 따르면 지자체장은 산하 기관 임원이 의무와 책임을 이행하지 않은 경우 심의위 심의·의결을 거쳐 해임할 수 있다. 또한 해당 기관에 손해배상 청구를 요구할 수도 있다.


도 보건복지국은 지난 2월 25일 오후 배기수 前 원장의 해임안을 처리할 예정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경기도의료원은 종합감사에서 방만 경영과 자질 문제를 지적받은 바 있다. 또한 배 前 원장은 지난해 7월 J전 기획조정실장을 자신을 모함했다는 이유로 도에 고발한 바 있다.


하지만 해임 안건 처리 하루 전날 그가 사표를 도에 제출하면서 자진 사퇴 모양새가 됐다.


A지방의료원장은 “해임 당하면 원장 개인에게는 불명예가 되는데 누가 버티겠느냐”며 “사실상 출자·출연법의 첫 적용 사례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도지사 등 지자체장과 코드 다르면 자리보전 위태


지방의료원장들은 ‘출자·출연법’이 앞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려 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경영 악화, 자질 부족 등의 잣대를 들이대면 해당되지 않는 의료원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B지방의료원장은 “만성 적자를 벗어나기 위해 경영 개선을 시도하면 노조와의 갈등이 발목을 잡고 노조와의 갈등이 길어지면 원장 자질이 부족한 것으로 평가된다”며 “원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갈아 치울 수 있다”고 토로했다.


실제 강원도는 속초의료원의 노사 갈등이 장기화되자 원장 사퇴를 노조와의 협상카드로 만지작거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노조와의 단체협약 해지 임무가 마무리 되는대로 속초의료원장은 물러나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인천의료원장 역시 사퇴를 종용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정복 시장 취임 이후 인천시는 의료원 출연금을 12% 삭감했다. 예산 압박 외에도 지난해 말부터 국장급에서 “그만 뒀으면 좋겠다”는 의사를 타진한 것으로 전해졌다.


C지방의료원장은 “인천의 경우 시민 사회가 조직이 잘 돼 있어 공개적으로 압박을 가하지는 못하지만 예산 삭감으로 의료원 적자가 심해지면 인천의료원장도 더는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출자·출연법이라는 합법적인 해임 도구가 있으니 도지사가 마음만 먹으면 자기와 코드가 안 맞는 의료원장을 해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원장 해임이 잦아질 경우 공공의료 위축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A지방의료원장은 “한 직장에 적응하고 전문성을 발휘하려면 3년이라는 시간도 짧다. 하물며 공공성과 수익성의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자리인데 원장 자리가 불안하면 어떻게 자신의 철학을 뚝심 있게 실천할 수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B지방의료원장은 “결국 나중에는 도의 코드에 맞는 공무원들이 지방의료원장직을 수행하게 될 지도 모른다”며 “이렇게 되면 공공의료는 도지사의 성향에 따라 좌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공공의료에 대한 전문성을 뚝심 있게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않으면 착한 적자를 지원한다 하더라도 원장의 책임 경영은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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