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대한민국에서 논문 표절은 우리 사회의 숨겨진 뇌관이었다. 박근혜 정부 인사청문회만 봐도 허태열 청와대 비서실장을 비롯해 윤성규 환경부 장관, 최문기 미래부장관, 이성환 경찰청장 등이 표절 의혹에 휘말렸다.
이어 더해 유명강사 김미경씨와 배우 김혜수씨 등 대중 파급력이 큰 인사들의 논문 표절이 공개되면서 사회적 지탄이 쏟아졌다. 이 중 몇몇은 공식 사과하며 논란을 마무리 지었다. 논문 표절을 인정한 이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표절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다”였다.
그렇다면 과연 논문 표절에 대한 의학계 인식은 어느 정도일까.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의학계에서 논문 실적은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최근 보건복지부가 연구중심병원을 선정하면서 더욱 가속화됐다. 연구 실적이 대형병원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중요 지표가 됐기 때문이다.
실제 최근 연구중심병원으로 선정된 가천의대 길병원의 경우, 논문에 대한 평가항목을 세분화해 교원평가에 반영했다. 논문이 게재된 학술지의 권위 등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인센티브를 차등 지급했다.
고대안암병원과 구로병원이 동시에 연구중심병원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한 고대의료원도 교원평가 점수 중 30%를 논문 실적에 할당했다. 연구원 인건비, 연구 공간, 장비 등을 제공하며 논문 실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결국 논문 실적에 따라 채용, 승진, 보수 등이 결정되는 구조가 갈수록 고착화되는 추세인 것이다. 이는 그만큼 논문 실적에 대한 압박이 강해지고 있음을, 표절에 대한 유혹 역시 커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의학계에서도 수면 위 떠오르는 ‘표절’
최근 한 국내 학술지 담당자는 외국 의학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자신의 논문과 비슷한 논문이 학술지에 게재됐다는 제보였다.
확인 결과, 국내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항의한 외국 의학자의 논문과 기초적인 아이디어, 구조 등이 매우 흡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단어와 순서를 조금씩 바꾼 정도였다.
국내 학술지 담당자는 학술지 내 편집위원회 위원들의 심의를 거쳐 해당 논문을 표절로 확정 짓고 게재를 취소했다. 저자는 학회 차원에서 징계를 받았다.
최근 표절은 의학계에서도 수면 위로 떠오르는 문제다. 과거 의식 없이 행했던 논문 표절들이 인식 제고 등의 이유로 속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의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이하 의편협) 출판윤리위원회 배종우 간사는 “지난 2년 간 학술지에서 조언을 구한 42개 건 중 표절과 관련된 것은 4건이었다. 중복게재 문제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추세라면 표절은 의료계의 새로운 문제다”라고 밝혔다.
의편협은 의학학술지 편집인이 가입해 편집 및 발간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고 편집 규정을 협의하는 곳이다.
특히 최근에는 외국 의학자나 학술지로부터 표절에 대한 제보를 받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고 있다.
배 간사는 “과거와 달리 최근에는 국제적으로 논문 검색과 링크 기능이 활성화 돼 논문의 교류가 국내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이 때문에 과거에 비해 외국으로부터의 제보가 많아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어 “외부에서 자신의 논문을 표절했다고 직접 항의를 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학술지 담당자는 “우리 의학자가 표절할 정도의 논문이라면 선진국 의학자들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한 나라의 경우 저작권 등에 대한 인식이 분명해 표절을 ‘절도’ 등의 큰 범죄로 여긴다”고 소개했다.
이어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나라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의학계 고질적 병폐 ‘중복게재’
사실 의료계에서 지속적인 논란을 낳았던 것은 표절보다 논문 중복게재다. 중복게재는 한 논문을 두 학술지에 싣거나, 연구 대상 등을 추가해 수정한 논문을 새 논문인 듯 발표하는 경우 등을 말한다.
논문이 학술지에 실리면 그 논문의 저작권은 대부분의 경우 학술지 단체가 갖는다. 다른 학술지에 2차 출판을 하기 위해서는 1차 출판을 한 학술지에 동의를 구한 후 이를 문서화 해 2차 게재 시 첨부해야 한다. 중복게재 논란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경우 발생한다.
한 교수는 논문 중복게재를 하는 이유에 대해 “모르거나 연구 결과가 같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의학 논문 대부분은 임상환자 자료를 토대로 한다. 예를 들어 환자 50명을 연구한 후 첫 번째 논문을 작성했다고 치자. 이에 100명을 더해 150명을 대상으로 같은 연구를 수행 한 후 논문을 작성할 때는 50명의 환자가 중복됨을 밝혀야 한다.
문제는 50명을 연구대상으로 하든, 150명을 대상으로 하든 연구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을 때다. 이 경우 두 번째 쓴 논문은 새로운 연구 결과가 아니기 때문에 학술적으로 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두 번째 논문에서 첫 번째 논문의 존재를 밝히지 않는다. 만약 논문 심사·편집위원이 첫 번째 논문을 알지 못한다면 두 번째 쓴 논문은 새로운 결과를 담은 참신한 논문으로 탈바꿈되는 것이다.
의편협 배 간사는 “그간 학술지에서 조언을 구한 건 80% 이상이 중복게재에 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 원로 교수는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중복 출판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국내 논문 발표 수가 부족했기 때문에 외국 학술지에 냈다가 번역해 한국 학술지에 싣는 것을 용인했다”고 전했다.
우리나라 학문적 수준을 엿볼 수 있는 대한의사학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원로 교수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대한의사학회는 해방 후인 1947년 창립돼 학술대회, 보고, 강연, 고의서 전람회 등 왕성한 학술활동을 벌였지만 학문의 특수성과 희소성으로 인해 저변이 넓지는 못했다.
80년대에 들어와 의료계의 원로회원들이 점차 고령화 되면서 학회가 오랜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1991년 재창립에 가까운 새로운 출발을 하고 나서야 80년 이후 거의 중단됐던 학술대회가 부활, 다시금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됐다.
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출판윤리에 대한 교육이나 인식은커녕 학문의 명맥을 잇는 것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이 때문에 중복 출판, 표절 등의 관행은 모든 학계에서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논문 출판 가이드라인 제정 등 자정노력
의편협이 1966년 1월 1일부터 2008년 2월 18일까지 논문 데이터베이스 서비스인 MEDLINE에서 취소된 연구를 분석한 결과, 213편 중 89편(41.8%)이 중복게재를 포함한 표절이었다.
나머지 52.1%(111편)는 날조 또는 변조였으며 그 외 저자논쟁 2.3%(5편), 윤리문제 2.3%(5편), 기타 1.4%(3편) 등이 뒤를 이었다.
표절에 대한 의식이 희박했던 의학계는 2005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으로 출판윤리에 대한 각성을 시작했다.
의편협 홍성태 부회장은 “황우석 사건 이후 출판윤리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갖게 됐다. 의학계 스스로도 출판윤리를 위반하면 연구 전체를 부정당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2006년부터 의편협은 각 학회를 중심으로 출판윤리에 대한 교육을 시작했다. 국제적 기준이 아닌 국내 출판윤리 기준 마련에 돌입했고, 2008년 ‘의학논문 출판윤리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대한의사학회 역시 대한의사학회 연구윤리규정에서 위조, 변조, 표절, 이중 출판 등 부정행위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규정하고 심의 기준도 마련했다.
대한의사학회 연구윤리규정을 살펴보면, 부정행위에 대한 제소는 학회 학술지 ‘醫史學(의사학)’ 편집위원회에 하고 편집위원회는 해당 제소를 전체 편집위원에게 알리고 부정행위 여부에 대한 의견서를 취합한다.
그 결과 편집위원 2분의 1 이상이 해당 내용을 부정행위로 판단할 경우, 편집위원회는 이 사실을 학회 회장에게 보고하고 부정행위 여부 검증을 위한 연구윤리위원회 구성을 건의한다.
학회 회장은 건의를 받으면, 회장이 임명하는 위원장을 포함해 7인 이상으로 구성된 연구윤리위원회를 이사회 의결을 거쳐 조직한다.
연구윤리위원회는 부정행위 검증과 관련하여 학술적 전문성을 가진 조사위원들을 위촉할 수 있다. 이때 검증 대상 연구와 관련되는 사람들은 연구윤리위원회 위원 및 조사위원이 될 수 없도록 했다.
홍 부회장은 “우리 스스로 표절이나 중복게재에 대한 자정 시스템을 구축한 것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고 강조했다.
이에 더해 의편협은 홈페이지에 ‘KoreaMed’, ‘Synapse’라는 온라인 학술지 플랫폼 데이터 베이스를 만들었다. 활발한 논문 정보 공유로 표절이나 중복게재 의혹을 줄이고자 함이다.
이종수 안과학회 편집위원장은 “최근에 논문 표절 등이 이슈가 되면서 회원들 문의가 많아지고 있다. 출판윤리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은 느낀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