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고재우 기자]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했던 왕진 시범사업 성적표가 변변치 않다. 짧은 시범사업 기간과 홍보 부족, 코로나19로 인한 대면 기피 등 핑계거리는 있지만, 의료계 반발을 무시한 채 추진한 것 치고는 겸연쩍은 결과다.
의료계에서는 왕진 시범사업 부진 이유로 정부의 지원 부족을 지적하고 있는데, 최근에는 한의 왕진 시범사업까지 추진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의료계 속내는 편치 않은 상황이다.
부진 면치 못한 의과 왕진 시범사업
왕진은 일차의료 왕진 수가 시범사업을 시행, 교통비와 기회비용 등을 보상하는 제도다. 대상은 거동이 불편하거나 진료 필요성이 있어 환자·보호자가 요청한 경우다. 마비나 수술 직후 인공호흡기 부착, 정신과 질환과 인지장애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시범사업 참여 의원에 왕진을 요청할 수 있다.
왕진 요청 환자는 왕진료 시범 수가와 해당 의료행위 비용의 30%를 본인이 부담한다. 거동이 불편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왕진을 이용하면 시범 수가 전액을 내야 한다.
그런데 결과가 영 시원치 않다. 2월 2일 보건복지부의 일차의료 왕진수가 청구 현황에 따르면 2019년 12월 27일부터 지난해 10월 31일가지 약 10개월 간 의과 시범사업 대상기관 321곳 중 실제 청구가 이뤄진 기관은 104곳(32.4%)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 수가 청구 환자는 1163명으로 기관당 11.2명 수준이었다. 총 건수는 3771건으로, 기관당 36.3건 청구에 불과했다.
의료행위와 처치 등을 모두 포함해 11만5000원으로 책정된 ‘왕진료Ⅰ’은 1017명(87.4%), 3399건(90.1%)이었고, 별도 행위료를 받을 시 적용되는 기본 8만원(교통비 1만원 포함)인 ‘왕진료Ⅱ’는 247명(21.2%), 372건(9.9%) 등이다.
청구가 가장 많았던 주상병은 욕창궤양 및 압박부위 378건, 본태성(원발성) 고혈압 305건, 알츠하이머·치매 218건 등으로 집계됐다. 이외에도 기타 척추병증 170건, 분류되지 않은 기타 연조직장애 166건, 2형 당뇨병 161건, 가중경부의 악성 신생물 155건, 등 통증 130건, 무릎관절증 118건, 파킨슨병 98건 등이 있었다.
부상병의 경우 위염 및 십이지장염이 966건으로 가장 많았다.
본태성(원발성) 고혈압 740건, 지질단백질대사장애 및 기타 지질증 511건, 위-식도 역류병 446건 등이 뒤를 이었다.
의료계 “진찰료 가산하고, 원격진료보다 왕진” 주장
의료계에서는 왕진 시범사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많았다.
대한의사협회(의협)는 시범사업 한 달 전에 의료계 의견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불참’을 선언하기도 했었다.
당시 의협이 내세운 이유는 “정부의 재택의료 활성화 추진 계획안이 국민건강권에 대한 고려보다 건강보험재정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경제적 목적에 부합한 것”이라며 “환자들이 재택의료서비스 혜택을 누리기가 어려워진다”고 했는데, 대폭 수정된 왕진수가에 대한 불만이라는 시각이 다수였다.
왕진 진료 후 추가업무와 소모되는 각종 치료재료, 교통비 등을 고려할 때 의사들 참여 유인이 낮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왕진 시범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진찰료 가산’이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의과 왕진 시범사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대한노인의학회에서 이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인 환자의 경우 일반 환자보다 진료시간·복약지도 등이 중요한 만큼, 소아 가산처럼 개선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완수 노인의학회 부이사장은 “노인 환자의 경우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고, 복약지도에도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진료시간 자체가 많이 걸린다”며 “소아청소년과도 가산제도가 있는 만큼 노인 진료비도 가산돼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다”고 주장했다.
김용범 회장도 “의사들에게 동기부여 할 수 있는 게 필요하다”며 “충분한 가산을 해줘야 노인 환자를 천천히 보려는 마음이 생길 것”이라고 거들었다.
왕진 시범사업에 참여 하고 있는 A개원의도 “병원을 유지할 정도의 수가는 지원해야 한다”며 “활성화되려면 정부가 돈을 더 써야 한다. 의사들이 국민을 위해 하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나서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의사들이 진료실 밖으로 나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며 “정부가 멍석만 깔아놓고 어떻게든 되겠지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덧붙였다.
노인의학회에서는 원격진료 대신 왕진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자고 말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앞으로 병원을 (의사) 개인이 혼자 하는 것보다 간호사·요양보호사 등과 그룹으로 해서 원격진료보다 왕진을 활성화 하는 방향이 어떤가 고려해야 한다”고 내다봤다. 그러면서 “의사들도 변화에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대처해야 하기 때문에, 의사 주도의 시범사업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의 왕진 시범사업 추진, 또 다른 논란 ‘예고’
한편 정부가 한의 왕진 시범사업 추진을 예고하면서 또 다른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기존 의과 왕진 시범사업도 지지부진한데, 효과성 등 미지수인 한의 왕진 시범사업 추진이 온당하냐는 것이다.
특히 의료계는 첩약급여화 시범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효과성·적절성 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1월 29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을 열고 방문진료하는 한의사에게 왕진료로 9만3000원을 지급하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의 방문진료 수가 시범사업 추진 방안’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한의 왕진 시범사업은 오는 5~6월께 시작된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나 보호자의 요청 시 한의사가 직접 방문해 치료를 진행하고, 한의사는 진찰을 통해 침술·뜸·부항·기본검사 등 질환관리를 한다.
왕진료의 70%인 9만3000원은 건강보험재정에서 지급되고, 환자 부담은 약 2만8000원(30%)이다.
이를 두고 의료계에서는 말이 많다. 행동하는여의사회는 2월 2일 성명을 통해 “정부는 추나급여화, 첩약급여화에 이어 이제 왕진 시범사업에도 한방을 참여시키며 한방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며 “한방 왕진 대상으로 수술 후 관리, 정신 질환, 인지 장애를 포함시킨다 하는데, 수술 과정을 모르는 한의사가 수술 후 관리를 어찌 책임지는가”라고 비판했다.
이어 “한의과 왕진 수가가 회당 10만원에 이르는데, 효과 없는 진료에 건강보험 재정을 낭비하고 정작 효과가 입증된 최신 항암제는 재정이 부족하다며 못쓰게 한다”며 “정부는 국민 건강보다 한의사 수익을 우선하는가”라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의료계 관계자도 “한방에서 치료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면서도 “수술 후 관리와 인지장애 환자의 한의학적 치료 효과를 입증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김교웅 의협 한방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은 “한방 왕진 시범사업에서 한의학적으로 치료효과가 명확한 것인지, 근거는 있는 지 등을 따져봐야 한다”며 “단순히 환자 만족도 여부만을 가지고 추진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