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3분 진료는 자괴감을 느끼고, 3000원 수가는 자괴감을 못 느끼는 것인가”라는 자조에서부터 “역시 서울대병원이라 다른 것인가. 조만간 국립대병원이 망할 수도 있겠다”는 비아냥까지 흘러 나왔다.
그럼에도 서울대병원의 이 도전은 암병원으로까지 확대됐다. 과연, 4개월 120일 여가 흐른 서울대병원의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젊은의사 4인 의기투합, 초진 환자 최소 15분”
얼마 전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를 찾은 서울 성북구 박모(48·여)씨는 기존의 진료와는 사뭇 다른 경험을 했다.
박씨는 건강검진에서 폐 사진이 하얗게 나와 결핵이 걱정돼 이 병원 호흡기내과 임재준 교수를 찾았다. 박씨는 몇 가지에 놀랐다. 우선 15분이 넘는 진료 시간에 놀랐다.
임 교수가 검사 자료를 유심히 살피더니 환자와 가족의 병력(病歷), 그간 받은 치료 등을 세세히 물었다. 그런 다음에 ‘유사결핵 의심’ 진단을 했다. 박씨는 “임 교수가 상세히 진찰하니 치료에 신뢰가 간다”고 말했다.
지난 3월부터 매주 토요일, 별도의 외래 진료를 개설해 초진 환자에 대해서만큼은 최소 15분 외래 진료를 하겠다고 한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 임재준(46) 과장[사진]과 이상민(45)·이진우(34)·최선미(34) 교수 등이 의기투합한 것이다.
환자들이 병원 콜센터로 초진 예약 전화를 하거나 인터넷을 통해 진료 예약을 하면 그 때마다 이를 공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시도는 사실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미국 병원들은 초진에 30분, 재진에 15분 할애하며 질병 난이도에 따라 의사들이 차등화해 진료 시간을 배정할 수 있고 그에 맞춰 진료비도 달리 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진료 시간 여부에 상관없이 의료기관 규모별로 일정액의 진료비를 받는 구조다.
병원들은 “환자 1명에 2만 여원 하는 진료비로는 외래를 운영하는 비용에 턱없이 모자란다”며 주어진 시간에 가능한 한 진료 환자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수익을 보전하고 있다. 이른바 속전속결, 박리다매 진료 방식이다.
게다가 정부가 내놓은 ‘차등수가제(의원급 의료기관에서 하루에 75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할 경우 급여를 삭감하여 지급하는 제도)’는 근본 원인에 대한 고려가 전혀 없는 언발에 오줌 눗는 식의 미봉책이다.
“정상적인 진료 해보고 싶은 취지에서 시작”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기에 호흡기내과 과장 임재준 교수 역시 큰 부담감을 안고 출발했다고 털어놨다. 3분 진료가 환자한테만 피해를 줄 것 같지만 의사들한테도 악영향을 준다는 판단에서였다.
임 교수는 “비뚤어진 우리나라 시스템을 고쳐보겠다는 거창한 목표 때문이 아니다”고 선을 긋고 “그저 3분에 1명씩 총알같이 환자를 진료하는 것을 지양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임 교수는 “환자를 철저하게 보지 못했다는 느낌, 심지어 환자들이 하는 말을 끊을 수밖에 없는 현실, 그리고 이로 인한 자괴감에 고개를 떨구는 의사들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검사나 잔뜩 의뢰하는 기계적인 의사가 아닌 15분 동안만이라도 환자와 대화하면서 진찰하고, 환자에게 공감하는 진짜 의사로 반나절을 보내는 경험을 해보는 것이 목표”라고 힘줘 말했다.
3시간 가까이 KTX 기차를 타고 올라와 3분 남짓 의사를 만나고 돌아가는 것이 우리나라 일상적인 외래 진료 모습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임 교수는 “더욱이 3분 진료는 서울대병원처럼 다른 병원을 다니다가 병원을 옮기는 환자들에게 취약하다”면서 “각종 기록이나 CD에 담아온 영상 검사를 천천히 살펴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짧은 시간에 환자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으니 도리없이 검사들에 의존하게 되고 그 덕에 병원이 겨우 문 닫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대한민국 병원계의 현실”이라고 안타까움을 표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평균적으로 1년에 14.3번 의사를 만나는데 이 수치는 다른 국가에 비해 월등히 높다. 핀란드 사람들은 1년에 단 2.7번만 의사를 만날 뿐이다.
올 초 호흡기내과가 ‘토요일 15분 진료’ 실험을 시작한 데 이어 이번에는 암 환자에게 확대했다.
서울대 암병원은 암 환자의 유전자를 분석해 최적의 치료법을 제공하는 ‘암맞춤치료센터’의 문을 열고 ‘암 맞춤치료센터’를 열고 위·대장·간·유방·폐·혈액 암 환자를 상대로 15분 진료를 시작했다. 환자들이 연이어 그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15분 진료는 화·금요일 오전에만 하며 암환자 맞춤 치료를 위해 개별 환자에 할애하는 진료시간을 2~3분에서 15분으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치료 대상은 위암, 대장암, 간암, 유방암, 폐암, 혈액암이며 점차 대상 암 종류를 확대할 계획이다. 참여 의료진은 종양내과센터 김태유 교수, 임석아 교수, 김동완 교수와 혈액내과센터의 고영일 교수 등이다 .
김태유 암병원장은 “암 맞춤 치료는 충분한 사전 상담과 최적의 치료법을 찾기 위해 1시간에 4명의 환자만 예약받기로 했다”며 “의료진은 이전의 2~3분이 아닌 15분간의 진료시간 동안 환자 상태를 파악한 후 최적의 치료제를 처방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폐암의 경우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발생할 수 있다. 폐암 유전자 변이는 크게 상피세포 성장인자 수용체(EGFR) 변이와 역형성 림프종 인산화효소(ALK) 변이로 나뉜다. 두 유전자형에 따라 암 환자에 각각 EGFG 억제제와 ALK억제제를 처방하게 된다.
환자는 우선 유전자 변화가 있는지를 검사 받는다. 유전자 변이가 쉽게 밝혀지지 않으면 별도의 유전자검사를 추가로 받는다. 의료진은 암환자에 효과적인 맞춤치료제를 찾는 연구도 하게 된다.
서울대병원 관계자는 “암맞춤치료센터는 지난해부터 시작한 연구중심병원 프로젝트의 핵심”이라며 “수준 높은 암맞춤치료를 위해 유전자 변화를 효과적으로 찾고, 새로운 표적치료제 개발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
센터장을 맡고 있는 김동완 교수는 “지금은 새로 온 환자에게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다”며 “앞으로 15분 진료를 통해 질병의 상황뿐만 아니라 환자의 사회·경제적 환경을 파악해 여기에 적합한 치료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는 “환자의 주거지·동거인·직업·병력·가족력을 확인하고 환자가 치료법을 얼마나 이해하는지 알려면 15분도 짧다”며 “환자를 종합적으로 파악해야 정확한 진단·처방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대상 암과 시간대를 늘릴 계획이다.
“환자 진료보면 15분도 모자라…적정수가 책정 절실"
서울대병원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병원 의료 현실은 ‘3분 진료’에 머물러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일산병원 내과 이찬희 교수팀이 지난해 9월 환자 1105명을 설문조사했더니 평균 외래진료 시간은 4.2분으로 나왔다.
가장 긴 감염내과가 7분이고 피부과는 3.1분으로 가장 짧다. 환자들은 만족할 수 있는 진료 시간으로 6.3분을 제시했다. 한국에서 3분 진료가 이뤄지는 이유는 진료 시간이 길건 짧건 진찰료가 같기 때문이다.
미국 메디케어(노인 의료보험)는 진료 시간에 따라 10분(44달러)~45분 이상(208달러, 초진 기준) 5단계로 나뉘어 있다. 한국은 정신과 진료만 15분 단위로 세 단계로 차등화 돼 있다.
복지부도 진찰 시간에 따라 진료비를 차등화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복지부 보험급여과 관계자는 “원하는 병원에 한해 차등 진료비 제도를 시범적으로 시행하도록 상반기 내 의료계와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재준 교수는 대한민국 외래 진료가 이렇게 후진적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원인을 잘 알고 있다.
임 교수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의료전달체계, 어떤 환자라도 일단 많이 진료해야 겨우 병원을 유지할 수 있는 수가 수준 등 여러 복합적인 이유들이 얽혀있다”고 짚었다.
물론,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서울대병원 호흡기내과의 이번 시도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임 교수는 “실제 의료진들이 경험했겠지만 15분이라는 시간도 충분치 않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의료의 질 향상은 비싼 약과 첨단 의료기기 영향도 있지만 환자들이 얼마나 의사를 신뢰하는 지가 관건”이라고 강조했다.
끝으로 임 교수는 “정부에 올바른 의료전달체계 확립이 시급하다”며 “대한민국 의사들이 충분히 진찰하고 환자와 깊은 대화를 해도 그에 상응하는 수가가 책정되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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