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가 빅데이터 열풍에 빠졌다. 빅데이터를 일컬어 ‘21세기의 원유’라고 표현하며 미래성장 동력으로 인식하고 있다. 우리 정부 역시 지난 5월 개방, 공유, 소통, 협력을 기본 가치로 하는 ‘정부 3.0 기본추진 계획’을 발표하면서 10대 중점 추진과제를 제시했다.
이런 정부 기조에 부응하고자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질병예고 서비스와 의료기관·의료인 평가까지 경쟁적으로 빅데이터 활용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의료기관 및 의료인을 위한 활용방안은 기획하지 않고 있다.
신성장동력으로 선정된 의료산업이 발전하려면 의료진과 연구자들에게도 신의료 개발을 위한 빅데이터가 절실히 필요하다. 국민 알권리에만 치중한 반쪽짜리 정부 3.0이 아닌 의료산업의 주축인 의료인을 위한 활용사업도 기획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최근 공공정보 개방과 활용을 강조한 ‘정부 3.0’ 기조에 따라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등이 보유한 보건의료분야의 빅데이터 활용 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특히 의료분야에서 ‘질병주의 예보 서비스’ ‘의약품 안전성 조기경보 서비스’ ‘심실부정맥 예측’ 등 3개 시범과제가 진행돼 빅데이터 관심이 더욱 높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건강검진, 보험료, 진료내역 등 8000억건의 데이터 공개가 논의되고 있으며 지난 8월 27일 건보공단은 연세대학교 보건대학원 지선하 교수팀과 ‘건강보험 빅데이터를 활용한 흡연의 건강영향 분석 및 의료비 부담’에 대한 공동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연구팀은 “1992∼1995년 일반검진을 받은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 피부양자(30세 이상) 약 130만 명의 질병정보를 2011년 말까지 19년 동안 추적 분석한 결과, 흡연 남성의 후두암 위험은 일반인의 6.5배, 폐암은 4.6배, 식도암은 3.6배였고 방광암(1.9배), 뇌중풍(1.8배), 췌장암(1.7배) 발병률도 증가했다”고 밝혔다.
여성 흡연자도 후두암 위험은 5.5배, 췌장암은 3.6배, 결장암은 2.9배였다. 방광암(2.1배), 폐암(2.0배), 자궁암(1.7배), 뇌중풍(1.7배)에 걸릴 위험 역시 높았다. 이에 따른 건강보험 재정 지출이 2011년 기준 1조6914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빅데이터 활용 연구로 암 발생률과 건강보험 재정 소요액이 구체적으로 추산됨에 따라 담배회사의 과실을 따질 논리적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한국 뿐 아니라 지금 선진국 등 다른 나라들도 의료분야 빅데이터 연구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이 발간한 `’빅데이터를 활용한 보건산업 신산업 전망 및 정책방향’보고서에 따르면 유럽연합(EU)도 의료 연구개발(R&D) 분야에 빅데이터를 활용한 뇌공학 연구 프로젝트인 'HBP(Human Brain Project)'를 오는 2023년까지 10년간 10억유로, 한화 1조4986억8000만원를 투입해 진행할 계획이다.
세계적 컨설팅사인 맥킨지도 임상에서 빅데이터를 활용할 경우, 비교 효과성을 분석하고 의사 결정을 지원할 수 있어 원격진료 수준이 향상되고 성과 투명성까지 제고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의료서비스 부문에서 적절한 빅데이터 활용이 이뤄질 경우 매년 1000억∼1900억달러 이상의 비용 절감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하는 등 의료분야에 대한 관심은 더 고조될 전망이다.
하지만 국내 많은 의료 관련 기관들이 빅데이터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반면, 자신들이 보유한 정보를 기관 간 공유하거나 공개하기를 꺼려 활성화되기 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메가트렌드 읽고 신뢰도 높은 연구결과 위해 필요”
의료계에서 생성되는 대부분 정보들은 개인정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에 공유나 공개가 쉽지 않다는 것이 그 이유다.
실제 보건의료분야 연구자들은 건보공단과 심평원의 방대한 자료를 자신이 추진하고 있는 연구의 근거로 사용할 기대에 부풀어 있다. 의학자들은 정부의 진료정보 공유를 원하고 있다.
그동안 연구를 위해 건보공단이나 심평원 등에 자료를 요청해 제공받는 과정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개인정보가 담긴 보건의료정보 빅데이터 공개는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최근에는 대형 종합병원을 위주로 차세대 EMR(전자의무기록) 도입 및 임상연구를 위한 빅데이터 플랫폼 구축이 일반적인 추세다.
대표적인 곳이 분당서울대병원으로 올 4월 차세대 EMR을 도입, 8월까지 안정화 과정을 거쳐 적용했으며, 기존 CDW(Clinical Data Warehouse)를 개선한 CDW 2.0 구축을 추진 중이다.
또한 서울아산병원, 아주대병원, 서울성모병원, 가천길병원 등 4개 병원은 각기 보유한 EMR을 기반으로 익명화 데이터를 체계화한 다기관 통합 CDW 구축을 추진할 예정이다.
분당서울대병원의 경우 2003년 CDW를 도입한 이후 지난 10년간 외래방문 840만건, 입원 40만건, 수술 25만건 등 총 820GB에 달하는 데이터를 축적해왔다.
분당서울대병원 정창욱 교수는 “현재 연구와 관련된 데이터는 오픈돼 있으며 연구자들의 반응도 좋다”면서 “치료관련 자료를 추가적으로 진행하고 있으며 과별 데이터도 축적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정창욱 교수는 “CDW2.0 프로젝트는 데이터 전문가를 위한 시스템이 아닌, 모든 임상 연구자를 위한 시스템 구축에 주목하면서 데이터의 활용도를 대폭 늘일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정 교수는 “연구자들에 따라 원하는 데이터도 다르겠지만 공단이나 심평원의 자료가 공개된다면 메가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유용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데이터 거버넌스 구축 선행돼야”
대학병원 교수 등 연구자들은 더 심도깊고 정확한 연구결과를 위해 자료 공개를 요청하고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불가하다는 정부. 하지만 건보공단이나 심평원이 진료평가 데이터를 근거로 병원평가 공개와 명의검색 시스템 도입 등을 계획하고 있어 심기가 불편하다.
질병예보와 개인맞춤형 질병 정보제공, 의료기관 평가와 의료인까지 평가하는 일명 ‘명의 검색 서비스’를 도입하겠다고 밝혀 의료계의 공분을 사기도 했다.
병원별 질병과 수술, 약제처방 등 병원 평가정보와 의사 개인별 질병, 수술, 약제처방 등의 자료를 국민을 위해서도 쓰고 미래 의학발전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들의 주장이다.
한 대학교수는 “심평원은 적정성평가와 비급여 진료비 등 의료기관이 원치 않는 정보를 공개하고 의료인까지 평가한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면서 “심평원도 방대한 진료실적 데이터를 개방해 유병률과 진료 패턴 등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정보 열람을 허용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방의 한 대학교수는 “솔직히 지역 병원은 서울 대형병원에 비해 수술 실적이나 환자 진료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해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 어려움이 많다”면서 “심평원이나 공단의 데이터가 개방된다면 많은 연구자들이 질 높은 연구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데이터의 가용성 및 유용성, 통합성, 보안성을 관리하기 위한 정책과 프로세스를 다루며 프라이버시, 보안성, 데이터품질, 관리규정 준수를 위한 데이터 거버넌스 구축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박병주 교수는 “공공기관의 경우 개인정보보호법을 내세워 기관이 관리하고 있는 자료를 외부에 내보내는 것을 꺼리고 있으며 의료기관 간 공유도 각자 고유한 전산시스템을 구축해 왔기 때문에 자료를 표준화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박병주 교수는 “데이터의 표준화와 개인정보보호 등의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심평원 한 관계자는 “연구자들에 대한 진료실적 데이터 개방은 개인정보보호 등의 가이드라인이 마련돼 있지 않아 사실상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