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 벌써
3명째다
. 그것도 사람을 살리는 병원에서 사람을 살리는 의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 진료실에서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유명을 달리한 교수
, 환자를 돌보다가 자신의 집무실에서 급성심정지로 돌연사한 응급의료센터장
, 36시간 연속근무에 당직실서 과로사로 세상을 떠난 전공의
. 이들의 희생을 계기로 고단한 의사들 삶이 재조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 실제 새해 벽두부터 들려온 잇단 비보(悲報)는 생명을 다루는 숭고한 직업이기에 늘 책임과 희생만 강요하고 정작 그 이면에 가려졌던 의사들의 애환과 고충을 간과한 결과물이라는 지적이다
. 일각에서는 그동안 누적됐던 의료계 위태로움이 한계치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 고인들의 희생은 불길한 전조 증상으로
, 당장 바로잡지 않으면 추가 희생을 막을 수 없을 것이란 우려가 팽배하다
.
여전히 위험한 진료실
강북삼성병원 임세원 교수 피살사건은 우리 사회 진료실 안전불감증의 민낯을 확인시켰다. 의료계는 그 동안 숱하게 안전한 진료환경 필요성을 강조했지만 울림 없는 메아리였다.
검사결과 등으로 극도의 불안·분노 상태에 있는 환자가 적잖고, 감정·정서에 병증이 환자가 상시 출입하는 병원, 그 곳에 근무하는 의료인들은 위험한 상황에 늘 노출돼 있다.
폭력 발생의 잠재적 위험이 높은 의료기관 특수성을 감안해 안전관리 시설 등을 법에 명시하고 비상벨, 보안검색대 설치 등 물리적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그나마 지난해 잇따라 응급실 주취자 난동이 발생하면서 응급의료 종사자 폭행에 대한 가중처벌법이 마련돼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하지만 응급실을 제외한 외래 진료실 등 병원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한 처벌 근거가 미미하고 위험을 최소화하거나 사건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방안이 전무한 실정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정신건강의학과를 비롯한 신경과, 성형외과, 피부과, 신경외과 등에서 환자나 보호자에 의해 의료진이 폭력에 노출되는 사건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있다.
장소별로는 진료실 64.6%, 응급실 22.2%, 환자대기실 10.5%, 병원 내 엘레베이터 등 기타 장소 2.7% 등 다양하다.
이에 따라 의료진은 물론 내원 환자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근본적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임세원 교수가 유명을 달리한 직후 올해 초 잇따라 의료기관에서의 안전확보를 위한 법안들이 잇따라 발의됐다.
해당 법안에는 의료기관 내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대해 강력처벌을 하는 것은 물론, 국가 지원 하에 보안장비 및 보안요원을 배치하고 비상문·비상공간을 설치하는 내용이 담겼다.
보건의료인의 신변보호를 위해 경찰관서와 연계된 긴급출동시스템을 구축하는 등 안전대책을 마련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한 대학병원 교수는 “의료현장 폭력은 응급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며 “여전히 의사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진료실에서 환자를 맞이한다”고 토로했다.
이어 “국회에서 관련 입법 작업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라며 “추가 희생자가 없도록 조속한 시일 내에 안전한 진료환경이 구축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피곤에 찌든 의사들
설 연휴 중인 지난 4일 숨진 국립중앙의료원 윤한덕 응급의료센터장과 지난 1일 사망한 가천대 길병원 2년 차 전공의 A(33)씨의 공통점은 모두 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정확한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의료계는 이들의 죽음 모두 '과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때문에 이제는 장시간 근무에 노출된 의료계의 근무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 의사들은 평균적으로 오전 8시 22분에 출근해 10시간 37분을 일하고 오후 6시 59분에 퇴근한다.
점심시간 1시간을 빼더라도 매일 권장 근로시간(8시간)을 1시간 37분이나 넘겨 '과로'하는 셈이다. 이 중 가장 오래 일하는 경우는 전임의들로, 평균 13시간 14분을 병원에서 체류한다.
봉직의사와 대학교수는 근무시간이 각각 10시간 25분, 11시간 54분이었다.
의사들의 이런 근로 여건은 '주 52시간 근무제' 시행에도 여전하다. 보건업은 노사 합의만 이뤄지면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되지 않는 특례업종으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특례업종의 경우 11시간 연속 휴게시간을 보장하라는 조건이 달렸지만, 응급진료, 야간진료 등으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늘은 몸 3개, 머리 2개였어야 했다, 내일은 몇 개 필요할까.” 윤한덕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이 생전 SNS에 남긴 글은 의료현장의 고충이 그대로 투영돼 있다.
흔히 레지던트로 불리는 전공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지난 2017년 12월 주 80시간 근무를 골자로 하는 전공의특별법이 시행됐지만 업무강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실제 대한수련병원협의회가 지난해 전공의 1208명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21.9%가 1주일에 80시간 넘게 일한다고 답했다. 유급휴가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응답도 30%에 달했다.
이번에 숨진 30대 전공의 역시 사망 전 24시간을 연속으로 근무를 했고 이어 12시간을 더 근무해야 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잇단 과로사를 계기로 의사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최대집 회장은 “대다수 의사들이 제대로 쉬지 못하고 1주일 내내 일하는 경우가 많다”며 “불행한 일이 재발하지 않으려면 근무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마지막까지 환자를 지킨 고인들의 희생은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줬지만 더 이상 추가 희생자가 나오지 않게 하는 게 숙제로 남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