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약보국(醫藥報國)' 신념으로 헌신 故 윤영환 회장
대웅제약 '정도경영·공생' 실천, 고인 유지 따라 조문 사양·온라인 추모관 개설
2022.08.23 06:32 댓글쓰기

국내 제약 1세대 창업주 대웅제약 故 윤영환 명예회장이 제약업계에 큰 족적을 남기고 지난 20일 88세 일기로 별세했다. 갑작스런 그의 영면 소식에 제약업계를 비롯한 많은 많은 경제계 인사들이 그를 추모하고 있다.


제약업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인사였음에도 가족들과 회사 측은 故 윤영환 회장 뜻에 따라 조문과 조화를 받지 않고 있으며, 외부 조문은 온라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온라인 추모관에는 3일 만에 1200명 이상이 방문해 추모 글을 남겼다. 제약계는 물론 경제계 인사, 대웅제약 전현직 직원 등이 참여했으며, 조문을 대신하는 추모의 글이 계속해서 올라오고 있다.


故 윤영환 회장 영면에 이토록 많은 이들이 애도를 전하는 데는 그가 제약업계에 이룩한 업적이 대단하지만, 그가 회사를 경영하면서 가졌던 철학이 그의 주변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는 점도 한몫하고 있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는 대한민국 제약산업 역사이면서 앞으로도 기업인들이 본받아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의약보국(醫藥報國), 좋은 약을 만들어 국민 건강 지키고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


1934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7년 성균관대 약대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다가 약국을 운영했다. 


그의 평생 철학이기도 한 의약보국 정신은 4평짜리 선화약국을 운영하면서 당시 국내에 좋은 약이 부족해 환자가 고통받는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움트기 시작했다.


그는 좋은 약을 만들기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1966년 '대한비타민'을 인수하면서 의미있는 기업인의 삶을 새롭게 출발했다. 


30대 초반에 제약회사 사장에 오른 그는 의욕과 자신감으로 가득차 있었지만 난관이 많았다. 고인은 야전침대를 구해 사장실 한켠에 갖다 놓고, 며칠 밤을 새우다시피 하며 회사 안팎을 살폈다. 


이런 그의 노력은 인수 당시 350만원에 불과했던 회사 월 매출을 5년 후 4000만원으로 11배나 성장시키는 큰 성과를 가져왔다. 다 쓰러져 가던 대한비타민사는 그렇게 부활했고, 업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의약보국 실현을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 됐다. 아직까지도 대웅제약을 상징하는 대표 품목인 우루사 연질캅셀을 1945년부터 생산했고 1973년 제약업계 4번째로 기업 공개, 1982년 업계 최초 금탑산업훈장 수상, 1984년 대웅중앙연구소 설립 등의 성과를 이룩했다.


그는 좋은 약을 만들어 국민 건강을 지켜주고, 건강한 사회로 만들어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 제약기업으로서의 사명이라고 믿었다.


또한 제약업이 영리를 떠나 단 한 명의 환자를 위해서도 의약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소신 하에 제약업을 통해 자신을 키우고 회사와 더불어 발전하며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경영이념으로 삼아 왔다.


평생을 지켜온 원칙 중심 '정도경영'과 '공생'


원칙을 중시하고 편법을 극도로 싫어했던 석천 윤영환 회장은 '어떤 일이든 그 과정이 정의로워야 성공할 수 있다'는 신조를 한번도 바꾼 적이 없다. 


당시 그가 인수한 대한비타민은 직원들 부정비리가 만연해 있었다. 고인이 이를 척결하고 정도경영의 길을 걷기 위한 유명한 일화가 지금도 전해진다.


그는 취임사에서 모든 사원들에게 "만약 내가 탈세를 한다면 여러분도 회사 돈을 맘대로 써도 좋다"고 천명했다.


처음엔 직원들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직원들 생각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탈세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회사 경영을 투명하게 하겠다는 것이고, '회사가 잘 되면 사장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게 아니니 결국 나에게도 이익이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직원들의 그 희망은 애사심 고취와 회사 발전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는 직원 중심의 기업 문화를 실현하는 윤영환 회장이 즐겨 쓰는 말이었다. 그는 새를 인재에 비유하며 기업인 숲이 좋으면 인재인 새가 저절로 날아든다고 여겼다. 


"보이는 모습 이전에 사람이 내부적으로 사람이 우선이다. 전체 주식의 3분의 1 가량을 직원에게 돌리겠다. 만약 우리 회사 주식을 사서 이익이 생기면 여러분이 모두 갖고 혹시 손해를 보면 제가 메꾸어 주겠다."


회사의 성장만이 아니라 직원들에 이익을 나누겠다는 그의 의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상생의 노사문화와 가족친화적 기업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우리사주제를 도입하고, 사원주택을 건설하며, 청년중역회의와 전직원 캠프 등을 시작했다.


그는 직원들의 개인적 성장이 회사와 사회의 발전과도 이어진다는 일념 아래 회사를 경영한 결과 대웅제약은 각계에서 성공한 CEO들을 많이 배출한 회사로 손꼽히며 CEO 사관학교라고도 불리게 됐다. 윤영환 회장은 자신을 회장님이라기보다 모두를 성공하게 만드는 성공공장의 공장장이라 자평하기도 했다.


소탈하며 가식없던 석천(石川) 윤영환 회장


소탈하며 어떤 가식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윤영환 명예회장 성품에 따라 장을병 전 성균관대학교 총장은 석천(石川)이라는 호를 지어줬다. 촌부 모습처럼 꾸미지 않고 소박한 생활을 하는 그가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돌과 개울처럼 정겨운 사람이란 뜻이다.


실제 그는 고인은 '비가 오면 비가 와서 좋고, 눈이 오면 눈이 와서 좋다'는 긍정적인 마인드로 일했다. 실패를 걱정해 본 적도 없고,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고 낙담한 적도 없었다. 그는 순리대로 정도를 따라 업무에 매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속담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였다. 뿌린 대로 거두는 자연의 섭리처럼, 모든 일에 무리를 가해서는 안되며 순리대로 처리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평소 소탈하고 검소하며 어떤 가식도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한때는 매일같이 칼국수를 즐겨 먹었는데 다 비운 그릇에 물을 훌훌 말아 들이키던 그에게서 권위적인 모습은 찾을 수 없었고, 어떤 양복은 하도 오랫동안 자주 입어서 반들반들 윤이 나기도 했다. 


그는 나라의 발전과 함께 성장해 온 기업이 이윤을 보다 지속가능하고 항구적인 방법으로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최고의 가치라고 여겼다.


이에 1984년 공익재단인 대웅재단을 설립했고, 2014년에는 호 석천(石川)을 딴 석천나눔재단을 설립사회공헌 활동에 투자와 열정을 아끼지 않았다.


대웅재단은 지난 2009년부터 지속적으로 국내 유학중인 외국인 대학생들과 해외 개발도상국 현지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총 2600여명에게 약 40억의 장학지원금을 지원해왔다. 특히, 장학사업 10년 차를 맞이한 2018년부터는 장학생들이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역량개발과 멘토링을 지원하는 ‘웅토링스쿨’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윤영환 회장은 영면하지만 의약보국 신념과 정도경영 경영 철학, 사람을 먼저라는 그의 마음은 후세에도 전해질 만 하다. 이런 그를 추모하기 위해 온라인추모관(https://remembered.co.kr/memorial/memorial/view/M00000001026)에는 지금도 많은 이들이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학력 

 ㆍ1953년 용산고등학교 졸업

 ㆍ1957년 성균관대학교 약학과 졸업

 ㆍ1976년 고려대학교 경영대학원 수료

 ㆍ 1979년 서울대학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ㆍ 1992년 성균관대학교 경영학 명예박사


연보 

ㆍ 1957년 부산 동아고등학교 교사

ㆍ 1958년 부산 선화약국 개업

ㆍ 1966년 대한비타민주식회사 대표이사(현 대웅제약)

ㆍ 1978년 주식회사 대웅제약 대표이사 사장

ㆍ 1981년 대한약사회 부회장

ㆍ 1982년 대웅 릴리제약 주식회사 대표이사 역임

ㆍ 1983년 한국 알피쉐러 주식회사 대표이사 역임

ㆍ 1985년 주식회사 대웅제약 대표이사 회장

ㆍ 1993년 제약협회 부회장 역임

ㆍ 2014년 주식회사 대웅제약 명예회장


상훈 

ㆍ 1982년 금탑산업훈장 조세부문

ㆍ 1987년 철탑산업훈장 노사부문

ㆍ 1994년 경제정의 기업상

ㆍ 1998년 국민훈장 동백장

ㆍ 2002년 경제정의 기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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