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츠하이머병 진행을 늦추는 치매 신약 ‘레켐비’(성분명 레카네맙)가 새로운 치료 옵션으로 주목받는 가운데 치매 중증도 기준이 치료 인프라 확대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치매는 경도인지장애나 주관적 인지저하 단계부터 조기 진단과 관리가 핵심이지만, 중증도가 낮아 대학병원에서 치료 인프라 확대를 위한 투자에서 늘 후순위로 밀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학회는 조기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는 레켐비 투여 시 뇌 영상 이상소견(ARIA) 모니터링을 위한 MRI 촬영 비용 급여화와 가족상담 수가 신설을 정책 제언으로 꼽았다.
최성혜 대한치매학회 이사장은 9일 열린 2025 치매학회 국제학술대회(IC-KDA 2025) 및 아시아치매학회(ASAD) 기자간담회에서 치매 신약 개발에 발맞춘 정책적 지원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최근 국내 주요 대학병원에서도 레켐비 처방이 시작됐으며, 현재까지 약 700여 건의 투약이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과 달리 실손보험 적용이나 건강보험 급여화가 이뤄지지 않아 고가의 치료비용이 환자에게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학회에 따르면 1회 주사 비용은 약 100만원, 연간 약 2400만원 수준으로 체중이 가벼운 환자의 경우 한 달 약 160만원까지 낮아질 수 있지만 여전히 경제적 부담이 크다.
특히 레켐비는 ARIA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투여 전·중·후 최소 3~4회의 MRI 모니터링이 필수다.
식약처는 5회차, 7회차, 14회차 이전까지의 MRI 촬영을 권고하고 있으며, 이는 환자 상태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현재 MRI 비용조차 비급여인 탓에 부담이 가중된다는 것이다.
ARIA 부작용 이슈…"동양인 반응 긍정적 상황"
현재까지 보고된 레켐비의 부작용은 대체로 경미한 편이다.
일본의 대규모 연구에 따르면 8000건의 투약 중 약 6.7%에서 ARIA가 확인됐으며, 대부분 무증상 혹은 영상에서만 확인되는 이상소견에 그쳤다.
동양인 발현율은 서양인보다 낮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실제 증상(두통, 어지럼증, 간질 등)은 드물게 나타나며 1% 미만이다.
그럼에도 국내에서는 MRI 모니터링 비용 전액이 본인 부담으로 남아 있어 조기 투여와 장기 치료를 방해하는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최성혜 이사장(인하대병원 신경과)은 “레켐비 급여화는 추후 논의하더라도, 현재는 부작용 모니터링을 위한 MRI 촬영 급여화가 시급하다”고 피력했다.
중증도 기준 문제…“치매 대학병원서 외면 받는다”
현행 건강보험 체계에서는 치매 중증도가 낮다는 이유로 대학병원에서 외면받는 구조가 고착되고 있다. 치매는 타 질환과 달리 중증도 단계가 아닌 초기에 진단과 치료가 핵심이다.
하지만 중증도가 낮다는 이유로 병원에서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치료 인프라가 악화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박기형 기획이사(가천대길병원 신경과)는 “초기 환자들은 대학병원에서 진단을 많이 받지만, 수가가 낮고 보호자 상담도 수가에 반영되지 않아 병원 입장에서 손해 보는 구조”라며 “진단에 필요한 검사도 많고 시간이 오래 걸려 일반 외래처럼 다루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또 “치매 진료는 보호자 교육과 케어가 핵심인데, 현행 수가 제도는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치매학회는 치료 인프라 확대가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알츠하이머병 역시 암처럼 진행 단계를 가지며, 각 단계별로 치료 전략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행 구조에서는 이 같은 치료가 제대로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이다.
전문가들은 알츠하이머병을 ▲1단계(무증상) ▲2단계(주관적 인지저하) ▲3단계(경도인지장애) ▲4단계(경도 치매) ▲5단계(중등도 치매) ▲6단계(심한 치매)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특히 중등도 단계에서 주사 치료 등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정지향 홍보이사(이대서울병원 신경과)는 “실손보험이 있는 환자는 몇 차례 입원이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환자는 경도나 중등도 치매 상태에서 주사 치료를 받기가 어렵다”며 “항암주사실처럼 치매 전용 주사실과 입원실 등 인프라 확대가 절실하다”고 말했다.
“국내 데이터 축적 중…급여화 핵심 근거 될 것”
현재 전국 44개 기관이 참여한 치매 리얼월드 데이터 연구 ‘조이알츠’(JOY-ALZ)를 통해 국내 환자의 안전성과 유효성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이 연구는 식약처 승인 이후 장기 효과 및 부작용을 관찰하며, 미국 등 10여 개국이 참여 중인 국제공동연구 ‘알츠넷’과도 연계되고 있다.
박 학술이사는 “1~2년 안에 조이알츠 연구결과가 발표되면 레켐비 등 신약 급여화의 핵심 근거가 될 것”이라며 “새로운 치료제가 등장한 지금 정책적으로 뒷받침하지 않으면 오히려 발목 잡는 결과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연구비 삭감이 아닌 연구비 확대의 필요성도 제기됐다. 레켐비 출시 이후 임상 연구와 치료 환경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는 만큼, 이를 이어가기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고성호 총무이사(한양대구리병원 신경과)는 “국내 치매 연구 수준은 국제적으로 뒤처지지 않지만 최근 2~3년간 연구비가 줄며 연구자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치매가 국가적 질환인 만큼, 초기 진단과 연구개발, 인프라 확충에 대한 투자는 오히려 확대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특히 “레켐비라는 새로운 치료 옵션이 등장한 지금 치료 인프라 구축, MRI 급여화, 중증도 기준 개선, 보호자 상담 수가 신설이 치매 정책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