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히 현재 중증응급의료 현장이 일부 전문의들 사명감과 책임감, 전문성에 대한 욕구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만큼 이를 개인 헌신으로 당연시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원은 최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연구보고서 ‘구조적 역경 속에서의 자발적 잔류: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들의 내적동기 탐구’를 발간했다.
연구는 서울 소재 3개 대학병원에서 중증·응급의료에 종사하는 전문의 16명(교수 8명, 부교수 3명, 조교수 5명)을 대상으로 심층면담 방식으로 진행됐다. 참여자 평균 전문의 경력은 17년이다.
순환기내과·혈액종양내과·신장내과·외상외과·흉부외과·신경외과·산과·응급의학과·소아응급의학과 등 다양한 진료과 전문의가 참여했다.
의료정책연구원은 면담 내용을 분석한 결과, 중증응급의료 전문의들이 높은 업무강도와 인력 부족, 낮은 보상, 사법적 위험 등에도 불구하고 현장에 남는 과정을 ‘조건부 잔류’로 규정했다.
이는 의료진이 무조건적인 사명감이나 희생정신으로 현장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조직적·제도적 조건이 일정 수준 유지되는 동안 잔류를 선택하고 있다는 의미다.
조건이 무너지거나 내부적으로 버틸 수 있는 동력이 소진될 경우 언제든 이탈로 전환될 수 있는 잠정적 상태로 풀이했다.
구체적으로 사명감, 의사로서 정체성, 임상적 성취와 성장 욕구, 동료와 환자 관계, 일과 개인생활 간 경계 설정 등이 잔류 동력으로 작용했다.
응급의학, 다음 세대에도 의미 있는 진로 될 수 있을까?
의료정책연구원은 현재 전문의들이 현장에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중증응급의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봤다.
중증응급의료 정책이 그동안 보상 인상이나 인력 충원과 같은 단일 처방에 상당 부분 의존했지만, 실제 전문의가 고민하는 문제는 경제적 보상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왜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가’, ‘이 일을 하면서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가’, ‘이 분야가 다음 세대에게도 의미 있는 진로가 될 수 있는가’ 등이 전문의들 잔류 여부를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에 정책 목표 역시 단순히 현재 인력을 현장에 붙잡아 놓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소진을 전제로 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잔류 구조’를 만드는 방향으로 전환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의료정책연구원은 “중증응급의료체계가 개인 사명감이나 성장 욕구를 사실상 정책 대체재로 사용하고 있다”면서 “정책은 개인 동기를 강화하는 방향보다 동기가 소모되지 않도록 구조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설계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체성과 사명감에 남은 의료진에게는 과도한 책임과 사법 위험이 집중되고, 성장과 전문성을 중시하는 의료진에게는 교육·시스템 개선 등 무보상 업무가 누적됐다”고 덧붙였다.
고위험진료 ‘보호’ 중요…교육·시스템 개선도 ‘공식 업무’ 인정 필요
의료정책연구원은 중증응급의료 전문의가 직면하는 법적·제도적 위험을 분산해야 한다고 봤다. 고위험 환자 진료에 따른 과도한 사법 위험은 전문의들이 공통적으로 지목한 구조적 장벽이다.
특히 환자를 끝까지 책임지려는 직업적 이상과 책임감이 강한 의료진일수록 의료분쟁에 개별적으로 노출될 경우 심리적 손상이 더 크게 누적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임상 현장 교육·멘토링 및 시스템 개선 업무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제언도 나왔다.
전문성·성장 기반으로 현장에 남은 의료진들은 교육 프로그램이나 진료 프로토콜을 개발하고 현장 시스템을 개선하는 과정에서 상당한 성취감을 느끼고 있었다.
문제는 이런 업무가 병원 보상체계에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연구원은 중증응급의료 교수들이 담당하는 교육과 멘토링, 프로토콜 개발, 의료 질 향상 시스템 개선 등 ‘비가시적 업무’를 공식 업무로 인정, 인사평가, 보상체계에 반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정책적으로 교육·연구·의료 질 개선활동에 공식적인 보상을 부여하고 의료진의 숙련도와 전문성을 반영한 인센티브 체계를 마련하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봤다.
개인 헌신 의존, 팀 진료 한계…당직·대기근무 최소기준 마련 중요
중증응급의료 현장에서 동료 신뢰, 팀워크를 개인적 관계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왔다. 현장 전문의에게 동료와 신뢰, 팀 결속력, 후배 교육 등은 중요 잔류 동력이 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해당 역할이 공식적인 조직구조에 편입되기보다는 일부 핵심 인력 개인적 헌신에 기대고 있어 특정 의료진이 이탈하거나 팀 구성이 흔들리면 전체 진료체계도 취약해진다.
연구원은 “팀 기반 진료체계를 강화하고 멘토링 구조를 병원 차원에서 공식화해야 한다”면서 “증응급환자를 담당하는 팀별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근무형태 자체를 장기근속이 가능한 방식으로 재설계할 필요성도 강조됐다.
연구에 참여한 의료진 가운데 일부는 중증응급의료 현장에 계속 남겠다는 의지를 보이면서도 가족이나 후배에게는 같은 길을 권하기 어렵다는 양가적인 태도를 나타냈다.
이에 당직과 대기근무의 빈도 및 연속성에 대해 최소한의 기준을 마련하고 경력단계에 따라 업무강도를 조정할 수 있도록 유연한 직무설계를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구체적으로 근무강도 상한 설정과 스탠바이·온콜(standby/on-call) 체계 재설계, 충분한 회복시간 보장, 유연근무 및 직무 설계, 장기근속 가능 인력 풀 구축 등이 방안으로 제시됐다.
연구원은 “시스템이 건강해서 의료진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스스로 업무 한계를 설정하거나 일정 부분을 포기하는 자기보호 전략을 통해 겨우 잔류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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