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한해진 기자] 결국 우려는 현실이 됐다. 2021년도 수가협상은 유형별 협상이 시작된 2008년 이래 처음으로 병협·의협·치협이 나란히 ‘결렬’을 외친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의료계 어려움을 최대한 고려했다’는 가입자 측 선언과는 달리 메르스 사태가 벌어졌던 2015년과 동일한 1.99%라는 수가 인상률이 주어졌고, 공급자 단체는 이를 거부했다.
협상과정 또한 큰 발전이 없었다. 마지막 협상 기일인 1일을 당연하게 넘겨 재정소위가 개최됐고, 2일 새벽이 돼서야 본격적 협상이 이뤄졌다.
“아예 고려 안하는게...” 불길한 전조
“코로나19 영향을 아예 배제하는 게 낫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수가협상이 본격화되기 전 첫 국민건강보험공단 재정소위를 마친 최병호 위원장의 발언은 의료계를 불안에 빠뜨렸다.
코로나19 리스크는 2021년도 수가협상에 있어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의료계는 특히 지난 3월부터 환자 감소로 인한 운영난을 호소해 왔다.
대한의사협회와 대한병원협회, 대한치과의사협회 모두 30~40% 내외의 환자가 감소했다는 조사결과를 내놨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 모두 최종 협상이 결렬된 단체다.
하지만 예년보다 높은 인상률 책정은 결국 가입자의 건강보험료 부담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코로나19 영향을 배제한 협상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게 최 위원장의 견해였다.
분위기가 다소 반전된 것은 2차 재정소위 후다. 가입자 측이 생각보다 많은 배려를 했다는 의견이 전달됐다.
최 위원장은 “작년 수준의 환산지수를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게 가입자 단체의 의견이었으나 코로나19로 극복을 위해 헌신하며 좋은 성과를 낸 것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성의는 보였다고 생각하지만 의료계가 만족할 만한 수치인지 확언하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예상대로 공급자 측은 석연찮은 태도를 보였다. 대한병원협회 송재찬 수가협상단장은 “1차적으로 제안된 대략적 밴딩은 우리가 만족할 만한 수준이 아니다”라며 “인식차가 큰 것 같다”고 밝혔다.
대한의사협회 박홍준 수가협상단장도 "건보공단과 바라보는 시각은 같다는 것을 느꼈지만 결국 협상 과정에서 간극을 좁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벌써부터 결렬을 고려하고 있지는 않다. 시각차를 줄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간신히 넘은 1조 벽 눈앞에서 좌절
1일 최종 협상 일정은 숨쉴 틈 없이 돌아갔다. 재정소위 전에 모든 공급자 단체가 30분 간격으로 3차 협상을 마무리했다.
오후 7시와 11시 이후 개최된 두 차례 재정소위 사이에 4~6차 협상이 진행됐다. 이 사이에 대한조산협회와 대한약사회는 협상을 마쳤다. 조산원은 3.8%, 약국은 3.3% 인상률에 합의했다.
자정을 넘겨 2일 새벽 4시경 대한한의사협회도 2.9% 인상률에 합의했다. 그러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이진호 수가협상단장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건전한 진료를 한 회원들에게 감사하다”는 짧은 코멘트만 남기고 회의장을 떠났다.
의협과 병협, 치협은 차례대로 결렬을 선언했다. ‘가입자와의 간극을 좁힐 수 없었다’는 의견이 공통적으로 나왔다. 최 위원장의 우려대로 시각차가 너무 컸다.
의협 박홍준 단장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했지만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며 3년 연속 협상 결렬을 확정지었다.
뒤이어 협상에 임한 병협 송재찬 단장도 “회원들게 죄송하다”며 “공단의 생각 차이를 좁히지 못했다”고 밝혔다.
치협 권태훈 보험이사도 “적정수가 보상 반영을 요구했으나 공단 측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국민·자영업자 등 모두가 어려운 상황으로 고통을 덜어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었다”며 결렬을 선언했다.
‘포스트 코로나’ 대비 의료계 남은 과제는
결국 요양급여 비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의원과 병원, 치과의 인상률이 건정심 판단 아래 놓이게 됐다.
건보공단 강청희 급여상임이사도 “50여차례의 만남에도 전 유형 타결을 이뤄내지 못한 점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만큼 어려운 협상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러나 작년보다 낮은 1.99% 인상률과 1조가 채 되지 않는 9416억원의 밴딩 폭은 이번 협상에 큰 기대를 걸고 있던 의료계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수치였다는 분석이다.
심지어 공단에 따르면 이는 1차에 제안됐던 1.7%에 비해 증가한 수치다.
공급자 단체들이 계속해서 ‘간극’을 언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9%의 인상률은 지난 2015년 메르스 사태 당시 진행됐던 2016년도 수가협상 인상률과 동일한 숫자이기도 하다. 우려했던 ‘메르스 악몽’이 실현된 셈이다.
당시 병협은 1.4%, 치협은 1.9%의 인상률에 결렬을 선언했고, 의원은 3.0% 인상률을 가져갔다.
메르스 타격을 호소하던 공급자 단체는 오히려 축소된 인상률과 추가재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병협은 건정심 후 수가협상단장과 임원진이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다.
평균 인상률은 같지만 유형별로 보면 올해는 병원 1.6%, 치과 1.5%, 의원 2.4%로 오히려 메르스 때가 상황이 더 나았다. 자연히 올해 결렬을 선언한 단체들의 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린다.
건정심에서는 이보다 더 낮은 수준의 인상률이 의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올해는 환산지수와 함께 수가를 결정하는 항목인 3차 상대가치점수 개정 작업이 예정돼 있다. 코로나19 이슈에 몰려 논의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SGR(지속가능성장률) 산출모형 개선도 과제로 남았다.
한편 이번 협상에서는 공급자와 가입자 양측 모두 유독 밴딩폭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는 분위기였다. 공단 수가협상단 측도 코로나19와 비용계약을 연관짓는 데 시종일관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밤샘 협상의 문제점은 여전히 남았다. 밴딩과 관련해 공급자 단체에서는 “당일 새벽 돼 봐야 아는 것 아닌가”라는 발언이 거의 공식화됐다. 실제로 2일 새벽 최종 재정소위가 종료되고 나서야 본론이 오갔다.
협상 시간이 계속 연장되는 데 대해 개선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많지만 결국 재정소위 결정에 따라 협상 판도가 바뀔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앞으로도 깜깜이 협상과 밤샘협상의 흐름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