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1년 10월 중순경 월요일. 여느 아침처럼 출근 후 지난주 방송에 대한 시청률 데이터와 시청자 반응, 프로그램 게시판 등을 분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청자 상담부서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왜 미리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주지 않았느냐며 상당한 불만을 나타냈다. 월요일 아침마다 겪는 의례적인 일상이라 생각했는데 그 정도가 예전과는 달랐다. 이유인 즉, 전(前) 주 금요일 저녁에 ‘명의(名醫)’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부터 이날까지도 밀려드는 시청자 문의 전화 탓에 업무마비 상태란다.
오후에는 출연한 ‘명의’가 있는 병원에서도 방송이 끝난 후부터 밀려드는 예약전화에 아우성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해당 병원은 개원 이래 이렇게 많은 전화는 처음이라는 등 반나절 만에 6개월 치 예약이 완료됐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프로는 시청률도 다른 ‘명의’ 프로그램의 평균 정도에 불과했고 방송 내용도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특별히 새로운 의료기술에 관한 내용도 없었다. 다뤄진 진료 분야도 이전에 이미 다른 ‘명의’를 통해서 방영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까지 시청자 반응이 뜨거울 줄 정말 몰랐다.
2009년 1월 초 신년특집으로 마련한 장기려 박사 편도 그랬다. 우리나라 의사들이 역대 최고의 명의로 꼽았기에 이 시대 의사들에게 사표(師表)로 제시해보자는 의도로 고(故) 장기려 박사에 관한 내용을 특집으로 다뤘었다. 현존하는 인물이 아닌 고인(故人)의 삶을 자료와 재연으로만 구성했는데도 그 어느 때보다 시청자들 관심이 폭발적으로 뜨거웠다.
몇 달 전에도 전라도에 있는 작은 시골병원의 의사분과 부산에 있는 대형병원에서 개업을 준비하던 의사분이 ‘명의’에 출연했다. 방송 후 전국 각지에서 밀려오는 환자들 때문에 병원 전체가 난리라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분들의 방송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른 내용을 다룬 것도 없었고, 다르게 포장하거나 일부러 연출한 것도 없었다. EBS ‘명의’에 출연하는 모든 의사들에게 적용되는 제한된 자격조건은 모두 똑같다. 그것은 ‘명의’ 제작진이 대외비로 갖고 있는 ‘명의 리스트’에 올라있는 분이어야만 한다.
‘명의 리스트’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전문 조사기관에서 전국적으로 약 3,000명의 전문의를 대상으로 전화를 걸거나 면접을 통해 질환별로 추천받아서 작성됐다. 방송에 출연하는 명의는 방송사에서 아이템을 정하듯 임의대로 정한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동료나 선후배들에 의해서 의술만을 기준으로 이 시대 최고의 의사로 추천된 것이다. 그러니까 ‘명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모든 의사들의 공통점은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의사로 ‘명의 리스트’에 올라있다는 점이다.
단지 전공분야만 다를 뿐이고 모두 ‘명의’이면서 다큐멘터리라는 똑같은 형식에 담아냈는데도 이렇듯 방송 후 시청자들의 반응이 뜨거운 프로그램이 종종 있다. 전체 제작진의 기획회의시 앞서 언급된 의사들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시청자들의 피드백이 남달랐던 방송분에 대해 자연스럽게 원인분석을 하게 됐다.
결론을 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분들에게는 의술(醫術)을 기준으로 선정된 ‘명의’라는 공통점 말고도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건 ‘인술(仁術)’을 펼친다는 점이었다.
‘인술(仁術)’은 국어사전에 ‘사람을 살리는 어진 기술, 의술을 이르는 말’로 돼 있다. 그러니까 인술이라는 말은 원래부터 그 자체가 의술을 말하는데 요즘 시대에선 통념적으로 의술과 인술을 달리 구분하는 분위기다. 다큐멘터리라는 프로그램 특성상 ‘명의’들에 대한 촬영은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그들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게 돼 있다.
그렇기 때문에 출연 의사마다 형식이 다를 수 없는데 그분들은 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과 태도, 눈빛, 손길 등이 달랐다. 그 속에는 따뜻함과 애정이 있었고 비록 화면을 통해서이지만 시청자들은 향기를 느꼈다. 그리고 그분들에게 기대고 싶었던 것이다.
EBS ‘명의’는 ‘명의 리스트’에 의거해서 프로그램 제작을 하지만 소위 ‘소문난 의사’들은 방송 전부터 이미 의술로 명성이 자자하기 때문에 밀려드는 환자들로 ‘3시간 대기, 3분 진료’가 현실이 된 지 오래다. 하물며 ‘명의’를 통해 방송으로 소개됐으니 그 악순환이 가중되는 건 불문가지(不問可知).
시청자들은 방송을 보고 찾아갔건만 그 ‘명의’들이 ‘세 마디도 안 한다’, ‘눈도 안 마주 친다’, ‘진료시간이 짧다’, ‘불친절하다’고 되레 우리 제작진에게 하소연한다. 이러니 방송에서 보이는 모습이 남달랐던 인술(仁術)을 펼치는 정말 향기가 느껴졌던 그분들에게 시청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아픈 몸을 제대로 치료받는 것이 우선인지라 의술(醫術)이 최고인 ‘명의’를 찾아와 인술(仁術)까지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은 환자들의 지나친 이기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명의’라는 타이틀 때문에 일반 의사들은 감당하기조차 어려운 스케줄과 휴식조차 취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초인(超人)과도 같은 생활이 다반사다. 그런 그들에게 환자인 나만을 위해 더 많은 시간과 이야기를, 덧붙여 친절하게 해 달라고 요구하는 건 무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더라도 환자나 보호자들 처지에선 그 질환에 대한 최고의 ‘명의’를 찾아 전국 각지에서 몰려왔다. 이유는 단 하나, 너무도 간절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좀 잘 치료하고 나아가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그것이 나의 목숨이든 부모 혹은 가족의 목숨이든 이 세상에서 매달릴 사람은 많은 의사 중에서 바로 그 ‘명의’뿐이라는 믿음 하나로 불원천리(不遠千里)하고 달려온 것이다.
의사에게 실력도 최고이길 바라면서 서비스까지 최고로 요구하고 있는 환자들과의 이 틈새를 메우기 위해선 그래도 그 ‘명의’들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의사들은 우리들의 마음까지도 치료해주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비록 초인적인 삶을 사는 ‘명의’들이지만 그분들의 아주 작은 실천 한가지면 해결되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부탁드리고 싶다. ‘환자들에게 말 한마디만 더,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따뜻하게 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