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료행위는 의료진의 의도와 무관하 갑작스런 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처치나 수술 과정에서 발생한 예상치 못한 상황은 환자의 생사를 결정하는 문제로 연결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유독 의료인들은 법정에서 잘잘못을 가리고 재판을 받아야 할 일이 많다. 지난해에도 수 많은 의료인들이 법정에 섰다. 재판부는 의료인이 원고 혹은 피고로 등장한 소송에서 의료행위의 적절성에 대한 판결을 내렸다. 의료계는 매번 재판부를 향해 의료행위의 특수성을 인정해 달라는 목소리를 냈다. 한 달 동안 28일 당직을 서고 70만원을 받은 전공의가 임금소송에서 패소해 전공의들의 공분을 샀다. 내시경 검사 중 천공이 발생한 사건에서 의사의 책임이 100%라고 선고하자 대한의사협회가 나서 반박했다. 반면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에는 전문의 판단이 가장 우선시 돼야 한다고 의사의 전문성을 높이 산 판결도 있었다. 또 긴 법정공방 끝에 분만 중 신생아에 장애가 생겼더라도 의료인이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취했다면 장애와 과실을 연결 짓기 어렵다는 재판 결과도 나왔다. 이에 데일리메디는 지난 한해 동안 의료계에서 눈길을 끌었던 크고 작은 판결들을 살펴봤다. [편집자주]
병원 전공의 당직비 갑질 진실공방
전공의 시절 당직비 수당을 두고 대학병원과 법정싸움을 벌인 의사가 끝내 패소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장이 일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의사 A씨가 B병원을 상대로 제기한 임금소송에서 원고 청구 기각 판결을 내렸다.
A씨는 B병원에서 2011년 4월부터 2013년 3월까지 전공의, 인턴을 거쳐 정형외과 레지던트 2년차까지 근무했다. 이 기간 동안 병원은 A씨를 비롯한 전공의들에게 매월 당직수당으로 70만원을 지급했다.
병원이 지급한 당직수당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한 A씨는 소송을 제기했다.
A씨는 “매월 평균 28일간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오전 8시까지 당직근무를 수행했음에도 매월 70만원의 수당을 받는 게 전부였다"며 "가산임금에 해당하는 1억1700여만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법원은 A씨의 주장을 기각하고 병원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당직근무 수행 시간을 특정하기 난해한다"며 “가산임금이 이미 지급한 당직수당의 합계액을 초과하는지 여부 또한 확정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재판부는 전공의가 당직 시간 내내 근무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병동이나 응급실에 상시 대기하는 게 아니라 전공의실 등 별도의 휴게공간에서 휴식 또는 수면을 취하거나 개인적으로 시간을 활용하다가 호출이 오면 간혈적으로 짧은 시간 당직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평일 주간의 통상 업무시간에 이뤄지는 진료업무와 비교할 때 당직은 보조적·임시적 성격이 강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당직근무는 해당 과에서 자체적으로 작성된 일정표에 따라 자율적으로 이뤄졌던 것으로 보인다"며 "실제 업무 수행 시간을 제외한 시간을 당직에 포함시킬 이유가 없다"고 판시했다.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이 판결에 대해 “병원의 갑질을 정당화하는 막대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다.
법원이 전공의의 야간, 연장, 휴일근무를 근무강도가 낮은 단순 대기성의 단속적 근무로 인정했다는 사실은 전공의들의 노력과 헌신을 무시한 행태라는 주장이었다.
대전협은 “전공의는 근로기준법에서 정한 근무시간보다 무려 2배를 근무하면서도 법에 명시된 기준조차 만족시키지 못하는 임금을 받는 등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토로했다.
의사 100% 책임, 이례적 판결
지난해 6월에는 내시경을 받다 실수로 환자를 식물인간에 이르게 한 의료진이 100% 책임을 져야 한다는 판결이 나와 의료계 내 이목이 집중됐다.
서울북부지법은 환자 측이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의료진에게 3억8000만원의 일시금과 함께 환자가 사망할 때까지 매달 400만원씩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의료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통상 의료사고 소송에서 의료진에게 100%의 책임을 묻지 않았던 만큼 이번 재판부의 판결에 대한 반감은 상당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재판부가 통상적 법리를 넘어 의료진에 100%의 책임을 명시한 이 판결은 의료의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일방향적 판단"이라고 비난했다.
이 사건은 지난 2014년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환자 A씨는 동네병원 의사 B씨에게 대장내시경을 받았는데 의사의 실수로 대장에 지름 5cm의 구멍이 생겼다.
환자가 고통을 호소하자 의사는 병원장인 C씨에게 시술을 넘겼고, 급기야 상급종합병원으로 전원했다. 상급종합병원 의사 D씨는 숨이 차는 증세를 호소하는 A씨에게 대장내시경을 실시한 끝에 대장에 구멍을 발견했다.
D씨가 접합을 시도하던 중 심정지가 발생했고 20여 분간 뇌 산소공급이 차단되는 일이 벌어졌다. 호흡기에 관을 삽입하는 과정에서 D씨가 연달아 실패했기 때문이다. 현재 A씨는 식물인간 상태다.
재판부는 의사 3명 모두 과실이 있다고 보고 과실에 대한 책임 100%를 져야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A씨가 기존에 대장질환과 지병이 없었음에도 의료진 과실로 천공을 입었고 추가검사 도중 쇼크를 일으켜 최종적으로 뇌손상을 입었다"며 "피고들의 책임을 제한하지 않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한의사협회는 “의료행위의 책임 제한 법리를 독자적으로 배척한 잘못된 판결"이라며 "상급심에서 바로 잡아질 수 있도록 의료계의 모든 힘을 모아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암(癌)' 판단 주체는 보험사 아닌 의사
10월에는 의사의 전문성을 인정한 판결도 나왔다. 재판부는 보험금 지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전문의의 판단이라고 봤다.
대법원이 암에 해당하는지 여부를 두고 벌어진 환자와 보험사 간 법정 다툼에서 환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법원 재판부는 이 사건에서 환자의 용종이 암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 원심의 판결이 잘못됐다며 파기환송하는 결정을 내렸다.
지난 2015년 A외과의원에서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던 B씨의 직장에서 0.4cm의 용종이 발견됐다.
B씨는 용종절제술을 받았고, 병리과 전문의는 종양발견 보고서를 작성했다. B씨의 주치의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암 판정을 하면서 '직장의 악성 신생물'이라는 진단서를 발급했다.
B씨는 암보험을 가입했던 C보험사와 D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두 회사는 암이 아닌 경계성 종양으로 보고 진단 보험금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지급을 거절했다.
이에 B씨는 보험금 소송을 제기해 두 보험사가 9700만원의 보험금과 지연이자를 지급할 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보험사들의 판단이 옳다고 봤다. 재판부의 감정 요청을 받은 의사들이 암이 아니라는 진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또 병리과 전문의는 보고서를 작성했지만 최종 진단까지는 내리지 않았음을 문제삼았다.
B씨의 주치의는 병리과 전문의가 아니며 약관대로 병리과 전문의가 최종 진단까지 내렸어야 했다는 판단이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같은 하급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대법원 재판부는 "B씨의 종양을 암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하다"면서 "약관 조항의 뜻이 명백하지 않은 경우에 해당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작성자 불이익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병리 전문의가 검사를 실시해 보고서를 작성했고 의사가 이를 토대로 진단을 내렸다. 이는 약관에서 말하는 병리학적 진단으로 암 확진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며 원심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분만 중 신생아 장애는 불가항력
분만 중 신생아가 입은 장애를 두고 억대의 손해배상금을 요구하며 가족들과 의료진이 벌인 법정싸움에서 의료진은 잘못이 없다는 판결도 나왔다.
서울고등법원은 분만 중 신생아에게 일어난 장애의 책임을 묻는 손해배상청구소송 파기환송심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까지 올라갔다가 파기 환송되면서 총 네 번의 재판을 거쳤다. 법원은 결국 이 사건에서 의료진의 무과실을 인정했다.
사건의 발단은 2009년 11월 중순 벌어졌다. A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산전 진찰을 받았던 B씨는 임신 38주째인 2010년 6월 10일 양막이 파열돼 A병원에 입원했다.
A병원 의료진 C씨는 초음파 검사를 통해 태아가 후방후두위 상태였지만 태아심박동 및 자궁 수축은 정상이라고 판단했다.
같은 날 자궁경관 안쪽으로 태아의 머리가 보이자 의료진은 자궁 상부를 7회에 걸쳐 압박하는 질식분만을 시도했다. 이때 태아의 머리는 잘 나왔지만 어깨가 산모의 골반 내에 걸려 잘 나오지 않는 견갑난산이 발생했다.
의료진은 B씨의 양쪽 다리를 배까지 끌어올려 치골궁에 압력을 견인하는 맥로버트 수기법으로 3.92kg의 D양을 분만했다.
출생 직후 D양이 울음은 없고 청색증의 소견을 보이자 의료진은 D양에게 자극을 주면서 기도흡인과 심장마사지, 앰부배깅을 실시했다.
이 같은 조치에 D양 상태는 다소 호전됐지만 울음이 강하지 않고 양쪽 쇄골 골절이 의심돼 의료진은 상급병원으로 전원이 필요하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후 E대학병원에서 입원치료를 받았으나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D양은 현재 뇌성마비로 인지기능과 발달기능 장애를 보여 뇌병변 1급 장애로 등록된 상태다.
B씨 가족은 의료과실을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1심 법원은 B씨 가족의 청구를 기각했고, 가족은 항소했다. 2심 법원은 가족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의료과실을 인정하며 병원에 3억7467만원을 배상하라고 주문했다.
이번에는 병원 측은 불복하고 대법원의 문을 두드렸다. 대법원은 "의료진의 과실로 이 같은 결과가 발생했다고 추정하기 어렵다"며 파기 환송했다.
서울고등법원은 해당 사건을 다시 심리하면서 대법원의 지적을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