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계가 과잉진료 방지를 위해 불필요한 치료를 덜어내기로 천명하면서 일부 의약품이 치료 수단 후순위로 물러나게 될지 추이가 주목된다.
대표적으로 항경련제 '발프로산', 진통제 '아스피린', 치매치료제 '도네페질' 등이 진료 현장에서 일상적인 사용을 줄여야할 약물로 지목됐다.
각 학회는 치료수단을 등급을 매겨 권고하는 진료지침을 개정하는데, 이와 별개로 근래 불필요한 치료·검사를 자제하고 근거 중심 진료를 추구하는 '현명한 선택' 캠페인에 하나둘씩 합류 중이다.
이에 캠페인 확산 및 회원 홍보가 전제돼야 일선 현장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지만 학회가 우선적으로 나서 특정 약물을 치료 근거가 부족한 과잉진료 수단으로 지목, 향후 행보가 관심이다.
최근 대한민국의학한림원(원장 왕규창)이 주최한 '현명한 선택 캠페인 심포지엄 2022'에서 이 같은 한림원의 새로운 진료 방향이 공개됐다.
기형 출산 가능성 높이는 발프로산, 가임기 여성 위험
대한신경과학회는 허혈뇌졸중 환자에서 예방 목적으로 항경련제 사용을 권고하지 않기로 했다.
선우준상 강북삼성병원 신경과 교수는 "허혈뇌졸중 환자에서 예방적 항경련제 사용이 발작 발생을 예방한다는 임상 근거가 아직 없다"고 밝혔다.
뇌출혈을 포함한 뇌졸중 환자를 대상으로 시행한 2개 무작위 대조군 연구에서 발프로산 성분과 디아제팜 성분 모두 발작 일차 예방에 효과가 없었다는 설명이다.
특히 발프로산과 관련해 학회는 "다른 효과적 항경련제가 있는 경우 가임기 여성에게 사용하지 않는다"고도 권고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권고하지 않는다'가 아닌 '사용하지 말라'는 권고인 만큼 근거는 강력하다는 설명이다.
선우준상 교수는 "임신 중 발프로산 노출은 신경관결손, 비뇨생식관결손 등 태아선천기형을 유발한다"며 "주요선천기형은 임신 3~4주째 발생하는데 임신 인지가 늦을 수 있다. 임신 전 약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프로산 제제는 데파킨크로노정, 데파킨정맥주사, 올트릴정·주, 바렙톨서방정, 에필람정·주 등이 국내서 유통되고 있다.
100년 역사를 가지고 국내서도 수십개 제품이 유통 중인 해열·진통·소염제 아스피린 또한 신경과 의사들이 일상적인 사용을 줄여나가야 할 약물로 꼽혔다.
신경과학회는 "뇌졸중이나 심혈관질환 병력이 없는 성인에게 예방적 목적으로 일상적인 아스피린 사용을 권고하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선우준상 교수는 "아스피린 사용 시 비치명적 심근경색, 뇌졸중 위험은 유의하게 낮췄지만 치명적 심뇌혈관사건 위험은 낮추지 못했다"며 "60세 이상에서는 일차 예방을 위해 저용량 아스피린 사용하는 게 순이득이 없다"고 설명했다.
치매 치료 시 활발히 쓰이고 있음에도 쉽게 추천하기를 경계해야 하는 약물들로 '도네페질', '리바스티그민', '갈란타민' 제제가 지목됐다.
선우준상 교수는 "치매 환자라고 해서 부작용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이러한 약물들을 무조건 추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약성 진통제 외 비약물치료 및 비마약성 치료제 고려
한편 미국에서 오피오이드 계열 마약성 진통제로 1999년 이래 65만명 이상이 사망하고, 국내서도 '펜타닐' 등의 오남용이 심각한 수준이 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학회들도 만성질환 치료 시 마약성 진통제 처방 자제에 나서기를 표방했다.
신경과학회는 "편두통 환자에서 마약성, '바르비탈' 계열 약제를 가능한 사용하지 않는다"고 추천했다.
마약성 진통제나 바르비탈 약제는 의존 및 중독을 유발해, 두통치료 목적으로 이들을 사용하면 부작용 위험 크기 때문에 가능한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한통증학회는 "비암성급 만성통증 환자들에게 일차적으로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환자에게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고 약물치료 전(前) 행동치료·물리치료 등 비약물 요법을 포함한 다방면 치료를 고려해야 한다"면서도 "비마약성 약물을 반드시 먼저 시도해야 한다"고 부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