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내 나이 서른셋. 2003년 1월 사랑하는 딸이 태어났고, 6개월 뒤 나는 희귀질환자 가족이 됐다. 올해 나는 쉰 넷이 됐으며 희귀질환자 가족 21년차다.
그렇다. 내 딸아이는 '선천성 수포성 표피 박리증 이영양형 열성'이라는 긴 병명을 갖고 태어나 21년을 이 대한민국에서 살아내고 있다.
우리 가족은 남들이 경험하기 힘든 사진처럼 박제된 몇 개의 이미지를 공유하고 있다.
여전한 '의료 서울민국'
아이 병명을 알기 위해 병원을 전전하던 중 처음으로 '수포성 표피 박리증'이라는 병명을 알려준 서울의 某대학병원 피부과 교수. "이런 아이들이 간혹 있어. 방법이 없어. 오래 못 살아."
21년 전(前)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2023년에 태어난 환아 부모가 오늘도 겪는 현실이다. 그나마 희귀질환자가 서울과 수도권에서 태어났거나 거주한다면 이는 축복이다.
지방에 살거나 도서 산간이라면 그곳은 전혀 다른 나라이거나 의료 재난 지역이다. 같은 질환 진단도 수개월에서 길게는 수년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서울에 와야 병명을 알게 된다.
병명을 안 뒤에도 지방 병원에서는 진료 및 치료가(근치가 아닌 대증치료임에도 불구하고) 불가하다. 이는 의료진 개인 문제가 아닌 의료시스템 전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2024년 2월부터 시작된 오늘의 대한민국 의료 현실은 의료개혁인지, 의료재난인지 알 수도 없고, 서울과 지방을 나누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신체적 고통에 더해지는 사회적 소외, '질병=징벌' 되는 사회
아이가 다섯 살 때, 외출 중에 만난 비슷한 또래 아이와 엄마.
딸 아이 외모를 뚫어져라 본 아이가 자신의 엄마에게 "저 아이는 피부가 왜 저래?" 물었고, 아이 엄마는 내 딸을 보고선 자신의 애에게 "너도 엄마 말 안 들으면 저렇게 돼"라며 급히 자리를 떴다.
아이는 물론 그 엄마조차도 악의(惡意)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저 무지했을 뿐이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매우 뿌리 깊으며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장애인과 대비되는 ‘비장애인’이라는 말은 현재 장애가 없는 사람도 언제, 어느 때 장애인이 될 수 있다는(될지 모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는 말이다.
희귀질환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선천적으로 또한 누구는 후천적으로 불시에 찾아온다.
대부분의 희귀질환이 유전자 변형에 기인하거나 유전질환이기에 나와 우리 가족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완벽한 유전자를 가진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른 모습의 유일한 존재일 수 있다. 이전까지 유전질환이 없었더라도 그 시작이 내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질병은 그저 질병일 뿐 ‘징벌’일 수 없다.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 더해 사회적으로 소외되는 심리적 고통까지 오롯이 희귀질환자와 가족의 몫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극복에 가려진 희귀질환자들 고통
열다섯을 넘기기 어려울 거라는 딸아이는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제법 공부를 잘해서 흔히 말하는 스카이(SKY) 가운데 한 대학교의 3학년에 재학 중이다.
학창 시절 수상을 하거나 장학금을 받으면 빼놓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희귀질환과 장애를 극복하고···" 유감이지만 아이와 우리 가족은 희귀질환과 장애를 한 번도 극복한 적이 없다. 그저 안고 살아갈 뿐이다.
물론 희귀질환은 극복의 대상이며, 극복 성공담은 언제나 감동을 준다. 감동은 순간이지만 삶은 지속된다. 희귀질환도 지속되고 그에 따른 고통도 지속된다.
마약성 진통제로도 막을 수 없는 지옥 같은 고통이 수시로 딸에게 찾아온다.
모든 희귀 질환자는 어떤 형태로든 결국 그 고통에 굴복하고 만다. 우리가 ‘극복의 성공담’이 아닌 ‘굴복의 실패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희귀 질환자와 그 가족의 모습이 온전히 보인다.
희귀 질환 극복은 도대체 누가, 어떻게 하는 것일까?
희귀질환 치료제를 개발하고 수술법 등을 혁신해 완치 가능한 질환으로 만드는 일, 그렇게 희귀 질환을 하나하나씩 극복해 나가는 주체는 의료 연구진일 것이다.
특히 희귀질환을 안고 살아가는 환자와 가족이 그 모든 어려움을 홀로 감내토록 내버려 두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주체는 국가여야 한다. 그래야만 일거에 모든 희귀 질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을 한층 높여 줄 수 있다.
희귀질환자도 시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21년 전 희귀질환을 진단받고, 초등학교 입학 전에는 치료제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기대는 조금씩 미뤄지다 어느새 사라졌다. 하지만 분명히 치료제는 개발될 것이다.
수포성 표피 박리증은 이제 더 이상 희귀·난치성 질환이 아닌 인류가 완전히 극복한 매우 시시한 질환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날이 온다고 희귀 질환이 없어질까? 극복되는 질환만큼 오히려 더 많은 희귀 질환이 새롭게 발견돼 질병관리청 홈페이지에 등재될 것이다.
80만 희귀 질환자 존재 인정을 선의를 가진 개인이 아닌 국가와 사회로부터 받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희귀 질환자들이 그저 시혜 대상에 머물지 않도록 정당한 시민권을 요구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희귀 질환 정책은 희귀질환 관리법에 근거한다. 하지만 법 어디에도 희귀 질환자의 사회적 권리와 국가의 의무에 대한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동복지법, 노인복지법, 장애인복지법, 하물며 재소자 복지법도 각각의 법률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해당하는 시민 권리와 국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희귀 질환자들도 그에 따른 권리를 부여받아 시민의 한 사람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한다. 지금의 제도로는 희귀 질환자와 그 가족의 삶을 구할 수 없다.
육체적 및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추동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는 선제적 정책이 필요하다. 그래야 치료제가 없어도 환자의 삶을 구하고, 종래에는 사회적 비용도 줄일 수 있다.
희귀질환을 갖고 있지만 건강한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꿈, 그리고 그 꿈을 키우는 사람들 곁에 대한민국 정부와 국회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책적·법률적 대안을 제시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