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년 3.1운동 선두에 섰던 '경성의전 학생들'
당시 항일운동 활약상 재조명···일제 탄압 결연한 항거
2020.02.10 18:42 댓글쓰기
[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의 대명사인 3.1운동을 앞두고 의대생들의 활약상이 재조명 되고 있다.
 
31일과 5일에 서울에서 일어난 두 차례의 대규모 만세시위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생들은 바로 지금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들이었다.
 
191641일 관립 의과대학인 경성의전이 개교했다. 대한제국의 국립 의학교육기관이었던 의학교와 조선총독부의원 부속 의학강습소를 인계한 형식이었다.
 
교수진은 대다수가 일본인이었고, 학생들은 일본인과 조선인 공학이었다. 수업연한은 예과 없이 본과만 4년이었다.
 
모든 학사 운영이 일본인 위주였으나, 조선인 학생들은 민족차별을 받으면서도 우수한 성적과 응집력을 바탕으로 일본인 교수 및 학생들에 맞섰다.
 
3.1운동이 발발한 1919년 당시 모든 학교의 학기는 41일에 시작돼 이듬해 331일에 끝났다. 3월 하순에 졸업식과 봄방학이 있었고, 3월 초중순에 학년말 시험이 있었다.
 
따라서 19192월 경성의전은 학년말 시험을 치르기 직전 상황으로 분주한 때였다. 225일 예비시험이 치러졌고, 1학년 학생들은 31일 오후 조직학 시험이 예정돼 있었다.
 
학교 당국의 학생 통제도 강화됐다.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이 2.8독립선언을 단행했던 탓에 국내 상황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3.1운동 참여가 쉬운 상황은 아니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이성과 감성은 이미 대규모 항일운동의 발발과 독립을 염원하고 있었다.
 
전국 규모 항일운동 도화선
 
19192월 서울의 각 학교 학생대표들이 독립운동 논의와 준비에 착수했을 때 경성의전 4학년 김형기와 2학년 한위건은 처음부터 학생대표 모임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한위건은 독립운동 필요성 제기, 중등학교 학생대표 선정, 학생들만의 2차 시위 제안, 독립선언서 배부 등을 주도하며 당대 학생운동진영의 최고 지도부로 활약했다.
 
이어 김형기, 유상규, 한위건, 길영희 등 경성의전의 학년별 대표들은 동급생들에게 3.1운동 계획을 전하며 시위 참여를 독려했다.
 
신문 기사와 소문 등을 통해 민족자결주의와 해외의 독립운동 소식을 알고 있던 학생들은 이에 호응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기 시작했다.
 
31일 서울의 1차 시위 때 김탁원은 파고다공원 앞에서, 김형기는 종로 종각 앞 사거리에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익종은 종로4가에서 연설을 통해 독립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352차 시위에는 장세구, 이강, 이형원, 전진극, 김창식 등이 남대문 인근에서 시위에 참여했다.
 
19193~4월 시위 현장이나 하숙집 등에서 체포된 경성의전 학생은 40명이었다. 8월에 예심이 종결된 후 40명 중 32, 80%가 공식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서울의 7개 전문학교 학생 중 77명이 재판에 회부됐는데, 그 중 경성의전 학생이 32명으로 가장 많았다. 비율로는 41.6%에 달했다.
 
하숙생활 친구가 항일운동 동지로
 
경성의전 학생 32명 중에는 평안도와 함경도 출신 학생이 많았으며, 그들을 중심으로 한 '하숙 네트워크'는 경성의전 학생들의 3.1운동 참여에 기폭제가 됐다.
 
당시 서울의 북촌이나 각 학교 인근에는 하숙집이 많았다. 전문 하숙집보다는 지식인층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더 많았다.
 
서울에 일찍 올라와 자리를 잡은 지식인이 고향 후학들을 하숙생으로 들이는 경우였다. 서울에 평안도와 함경도 학생 '전문' 하숙집은 제법 많았다.
 
같은 전문학교 선후배뿐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하숙생활을 통해 '동지'가 됐다. 하숙집 학생들은 정세를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의기투합해 시위에 함께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경성의전 학생들이 3.1운동에 참여하게 된 궁극적인 동기는 조선이 독립국이기를 염원하는 마음과 일제의 가혹한 조선 통치, 즉 민족차별과 경제적 수탈 때문이었다.
 
3.1운동 당시 경성의전 학생들의 적극적인 항일운동 참여는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인의 희망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선두에서 고민하고 행동했던 학생층의 모습 그대로였다.
 
졸업 후에도 독립운동 참여
 
3.1운동 참여 경력이 있는 경성의전 졸업생과 중퇴생들은 1920년대의 후반의 대표적인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서 활약했다.
 
조선공산당의 핵심인물이기도 했던 한위건은 신간회 창립준비위원으로 활동했다. 양봉근은 신간회 울산지회장과 신간회 본부 검사위원장을 맡았다.
 
김탁원은 신간회 경성지회, 최경하는 전남 목포지회, 정인철은 황해도 재령지회, 이강은 함남 북청지회의 핵심 간부가 돼 민족연합전선과 지역사회를 위해 노력했다.
 
유상규는 3.1운동 당시 경성의전 3학년 대표로 시위에 적극 참여한 후 체포를 피해 상해로 건너갔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였던 안창호의 비서와 흥사단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나창헌은 3.1운동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2학년으로서 만세시위에 적극 참여한 후 상해로 건너가 김구의 가르침을 받았다.
 
철혈단, 한국노병회, 병인의용대 등을 결성해 의열투쟁에 힘썼다. 특히 1926년 상하이의 일본총영사관을 완전히 파괴하는 쾌거를 이뤘다.
 
결국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던 경성의전 학생들은 3.1운동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전개됐던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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