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 2월 6일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을 발표한 지 3개월이 지났지만 의료계와 거리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다.
이에 의료계 안팎에서는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에 대한 고등법원 인용 여부가 사실상 현 사태를 종결할 마지막 출구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법원 판결에 따라 정부가 어쩔 수 없이 의대 증원을 물리며 사태가 진정되거나, 반대로 평행선이 지속돼 의료계가 우려한 국가 의료파국이 현실화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이달 중순 예정된 법원 판결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사법부 기댄 醫, 각하(却下) 행렬로 멀어져갔던 출구
정부의 의대 증원 추진으로 촉발된 의료사태가 법원으로 넘어간 것은 2000명 증원 발표 한 달째인 지난 3월 5일이었다.
당시 전국 33개 의과대학 교수협의회 대표들은 2000명 증원이 현행 고등교육법에 위배된다며 보건복지부 및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2025학년도 의대 2000명 증원처분 및 후속처분에 대한 취소소송'을 제기했고, 아울러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서도 제출했다.
의대 교수들에 이어 전공의, 의대생, 수험생 등이 차례로 소송전에 참여하며, 이 같은 내용의 행정소송은 총 8건으로 늘어났다.
그러나 서울행정법원은 지금까지 이들 소송 중 7건 이상에 대해 각하를 결정했다. 각하결정을 내린 모든 재판부는 의대 교수 등이 집행정지 신청을 할 자격이 없다고 봤다.
일례로 서울행정법원 행정4부(부장판사 김정중)는 지난 4월 3일 의대교수‧전공의‧의대생 등 18명이 제기한 집행정지 신청에 대한 각하결정문에서 "증원 직접 상대방은 의과대학을 보유한 각 '대학의 장(長)'이고, 신청인들은 직접 상대방이 아닌 제3자에 불과하다"고 판시했다.
의료계는 즉시 항고하는 한편, 대학 총장들에게 소(訴)를 제기하라고 촉구했으나 일말의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행정소송뿐 아니라 의대생들이 각 대학 총장을 상대로 제기한 민사소송도 기각당하며 법원에 대한 기대감은 다소 식어갔다.
항고심에서 반전 "정부는 10일까지 의대 증원 근거자료 제출"
그러나 의대교수 등 18명이 제기한 집행정지 항고심에서 반전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고등법원 행정7부(부장판사 구회근)는 지난 30일 열린 항고심 심문에서 정부에 5월 10일까지 의대 증원 관련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며 이달 중순께 예정된 법원 결정 전까지 내년도 의대 정원을 승인하지 말라고 고지했다.
의대교수 등을 대리하는 이병철 변호사(법무법인 찬종)에 따르면, 재판부는 심문에서 "신청인(의대 교수 등)들이 모두 원고적격이 없다면 정부의 처분을 다툴 수 없다는 결과가 되고 이는 허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2000명이 아니라 10만명을 증원해도 의대생 등은 이를 다투지 못한다는 뜻인가"라며 "법원이 사법 통제를 못하는 정부 결정은 있을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전국의과대학교수협의회는 즉각 "의대 증원 정책이 적법하고 근거 있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는 의료계 의견을 받아들였다"며 "법원 결정을 환영한다"고 반겼다.
반면 정부는 "충실히 자료 준비하겠다"면서도 대통령실이 재판부를 향해 "월권이다. 행정부가 사법부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발언하는 등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내년도 모집인원 발표‧주요 회의록 부재 등 '의정 공방' 갈수록 격화
항고심 이후 기대감에 부푼 의료계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정부의 날 선 법적 공방이 쉴 새 없이 이어지고 있다.
먼저 교육부가 지난 2일 정원이 늘어난 31개 의대가 한국대학교육협의회(대교협)에 제출한 내년도 모집인원을 취합해 발표하며 논란이 벌어졌다.
법원이 집행정지 결정 전까지 정원을 승인하지 말라고 요청했음에도, 정부가 사실상 내년도 모집인원을 확정했다는 지적이 일었다.
교육부 측은 이날 재판부에 참고서면을 보내 "모집인원은 아직 확정된 바 없으며, 확정은 재판부가 예정한 집행정지 결정 시기 이후인 5월 말경에 이뤄질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의대교수 측도 즉각 참고서면을 보내 "다수 언론도 '확정'이라고 보도했고, 수많은 국민, 수험생, 학부모들도 의대 증원이 확정된 것으로 오해하고 기망당했다"며 "교육부가 노리는 속셈은 국민들을 속여 확정된 여론을 형성하고 이를 악용해 재판부를 압박하려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논란이 식기도 전에 법원이 요구한 자료 중 의대 증원을 논의한 의료현안협의체,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의사인력전문위원회의 회의록이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분위기가 격화됐다.
전의교협에서 정부의 자료를 검증하기 위해 30~50명 규모의 전문가 조직 구성에 착수하는 등 의료계는 회의록을 비롯한 증원 근거 자료에 매우 큰 관심을 나타낸 터였다.
정부 측은 "회의록 작성 등이 의무화돼 있는 법상 협의체가 아니어서 별도 관리하는 회의록이 없다"고 해명하며 "보도자료가 사실상 회의록"이라고 설명했으나, 의료계는 공공기록물관리법 위반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나아가 이병철 변호사는 전공의 등과 7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에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 등을 직무유기죄 등으로 형사고발하겠다고 예고했다.
醫 "법원 결정도 중요하지만, 증원 근거자료 공개에 기대감 더 크다"
의대 정원 2000명 증원이 발표된 지 3달, 전공의 사직과 의대생 휴학에 돌입한 지 2달여, 법적 공방이 시작된 지 2달, 그리고 교수들마저 병원을 떠나기 시작한 지 열흘가량 지났다.
그러나 그간 2000명 증원에 대한 의정 간 입장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만을 향해 가고 있다.
의료계 한 원로 인사는 "정부의 입장 변화를 기대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것 같다"며 "의료계 역시 정부의 입장 변화 없이는 한 발도 물러서지 않을 태세"라고 바라봤다.
그러면서 "그나마 법원에서 집행정지가 인용된다면 정부가 마지못해 증원을 중단하는, 지금으로선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나오지 않겠나"라고 기대하면서도 "이밖에 달리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만 법조계는 지난 30일 항고심 내용에 대해 "결정을 위한 근거 자료를 요청한 것으로, 한쪽에 더 무게를 둔 것은 아니"라며 과도한 기대감을 경계했다.
의료계도 법원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도, 결과보다 내용에 더 관심을 쏟고 있다.
김창수 전의교협 회장은 지난 4일 열린 기자회견 백브리핑에서 "재판에서 이기냐 지냐 문제보다 정부가 제출하는 자료가 정말 어느 정도 수준인지, 도대체 국가의 백년대계를 결정한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밝혔다.
이어 "해당 자료들이 공개되면 국민들이 깜짝 놀랄 것"이라며 "전문가들이 자료를 철저히 검증해 공개하겠다. 정부가 부디 검토 가치가 있는 자료들을 충실히 제출해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