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피폐해진 정신상태로 더는 대학교수로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의료 미래가 사라진 이 땅에서 더 이상 필수의료에 몸담아 일할 자신이 없고, 교수 지위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지역거점국립의대인 충남대 의대 심장내과 이재환 교수가 사직의 결심을 굳히며 이 같은 내용이 담긴 사직의 변(辯)을 남겼다.
이 교수는 지난 1994년 서울아산병원에서 전공의와 전임의를 거쳐, 2003년부터 20여년간 충남대병원과 지난 2020년 개원한 세종충남대병원의 심장내과 교수로 근무했다.
"매년 100일정도 당직 서면서 응급 환자 오면 부리나케 뛰어나갔는데"
이 교수는 "그동안 저는 필수의료 한 분야에서 최고 진료를 환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며 "매년 100일가량 당직을 서면서 급한 환자가 왔다는 연락을 받으면 부리나케 뛰어나가고 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저를 지탱해왔던 교수로서의 자부심, 보람, 책임감은 무력감과 자괴감, 절망으로 바뀌었다"며 "2000명 증원 후의 대한민국 의료가 어떻게 망가질지 뻔히 알기에 복잡한 생각들로 머리속은 가득 차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매주 88시간, 주 2회 밤당직과 연속 36시간 근무에도 불평없이 일하던 전공의들이 수련을 포기했다. 또 사랑하는 지도학생이 내민 휴학신청서에 눈물을 흘리며 서명했다. 지금도 그들이 느꼈을 절망 및 분노, 모멸감에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고 한탄했다.
이 교수는 현 의료시스템 문제와 이에 대한 정부 해결책을 비판했다.
"환자 설득해 1차 병의원으로 보내려 하지만 의사-환자 관계만 나빠지고 장기처방전 발행"
그는 "어느 유튜버가 '2~3분 진료하고 진료비만 엄청 뜯어가는 의사들을 좋아할 국민이 있겠냐'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며 "어떻게든 환자을 설득해 1차 병의원으로 보내려 하지만 시간은 허비되고 의사와 환자 관계만 나빠지다 보니 수개월 장기 처방전을 발행하는 사례가 일상화됐다"고 밝혔다.
이어 "박리다매 진료와 무너진 의료전달체계가 의사들이 줄기차게 정부를 향해 개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의 엉뚱한 2000명 증원 정책과 이로 인한 전공의 사직, 이어지는 정부 태도에 저는 희망의 끈을 놓았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 사태에 직면한 스스로를 자책하며, 병원을 떠나겠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잘못된 의료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없이 살아 온 저 스스로가 한심스럽다. 후배들에게 면목 없고 국민들께 죄송할 따름이다. 위기를 넘긴 환자와 안도하던 가족들 모습들을 위안 삼아 그럭저럭 순응하며 살아왔던 제 인생에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이어 "사직서가 정상적으로 처리될 때까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환자 분들을 돌봐 드릴 것"이라며 "저를 믿고 아픈 몸을 맡겨 주신 환자와 가족분들게 끝까지 지켜드리지 못하는 점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사죄의 말씀을 올린다"고 덧붙였다.
충남의대 교수들 223명, 사직서 취합 후 29일 일괄 제출
이 교수를 비롯해 충남의대 교수 중 200여명이 사직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충남의대 비대위는 지난 주말에 소속 교수들을 실시한 사직 관련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287명 중 223명(77.7%)가 사직에 동의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교수들은 사직서는 개별적으로 작성해 이달 29일 오전 까지 비대위에 제출하며, 비대위는 이를 취합해 29일 오후 대학과 병원에 제출할 예정이다.
충남의대 비대위 관계자는 최근 정부가 전공의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을 보류하는 등 화해 모드로 전환하는 것에 "의정 간 중재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도 "근본적으로 2000명 증원에 대한 언급 없이 전공의 면허정지만을 논의하는 것은 언론플레이"라고 경계했다.
이어 "충남의대 비대위 교수들은 개인적인 판단에 따라 사직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다"며 "사직서 처리가 완료될 때까지 우리 건강이 버텨줄 때까지 환자 진료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