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정연‧임수민 기자] 2022년 전기 인턴모집은 이변의 연속이었다.
매년 예비 전공의들의 경쟁이 치열했던 빅5 병원은 미달 사태가 난 반면 평균 정도에 머물던 공공병원은 주요 대학병원을 제치고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다.
의료계에서는 다양한 원인을 꼽는다. 가장 중요한 요소로는 ‘순혈주의 문화’에 주목했다. 향후 레지던트 선발에서 얼마나 자교 출신을 우대하는지가 중요한 결정요소가 됐다는 분석이다.
단순히 ‘눈치싸움’에서 벌어진 해프닝이란 분석도 있다. 빅5 병원에 대한 선망은 여전하지만 지나치게 높은 기준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하향지원을 감행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다.
“빅5 후광은 없다” vs “일시적인 눈치싸움”
이번 모집에서 가장 이목이 끈 부분은 역시 세브란스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의 충원 실패다.
세브란스병원은 155명 모집에 148명이 지원하며 0.95:1의 경쟁률로 마감했으며, 서울아산병원은 133명 정원에서 한 명이 부족한 132명이 원서를 접수했다.
모집 때마다 넘쳐나는 지원서로 고민했던 병원들이 이번에는 미충원 인원을 걱정하게 됐다.
의료계에선 두 병원의 미달 요인에 대해 조금 다른 분석을 내놓는다. 같은 빅5 일원이지만 두 병원의 특색이 다른 만큼 전공의 모집에 실패한 원인 또한 다를 것이라고 추측했다.
세브란스병원의 경우 ‘순혈주의 문화’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했다는 시각이 많았다.
연세의대 출신인 수도권 대학병원 A교수는 “세브란스 학풍이 원래 자부심이 강하다. 세브란스를 떠난 뒤에도 일종의 소속감을 갖고 밖에서도 뭉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 소재 대학병원 B교수는 “일반적인 대학에선 ‘고려대’, 의대에선 ‘연세대’가 결속력이 강하다.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학교인 만큼 서울의대와 유일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자존심이 있다”고 전했다.
이어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잘못 형성돼 자교출신을 더 대우하는 경향이 있다. 레지던트 선발에도 일부 과에서는 대부분 자교 출신으로 채우며 의대생들 사이에서는 ‘타교생들의 무덤’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세브란스병원의 순혈주의 문화가 유명한 것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러한 지적이 계속되면서 세브란스병원 자체적으로도 타교생 비율을 늘리고자 하는 노력도 했었다.
세브란스병원 레지던트의 자교생 비율은 ▲2004년 13% ▲2005년 8% ▲2006년 11% ▲2007년 35% ▲2008년 57%로 늘었다. 지난 2012년에는 레지던트 중 51.8%를 타교 출신으로 채웠다.
서울대(44.4%)보다도 높았다. 실제 이번 모집에서도 자교생 지원자가 전년 대비 감소했다는 전언이다.
다만 세브란스병원은 최근 수년 간 전공의 중 타교생 비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다른 주요 대형병원들은 전공의 모집 홍보 책자 등에서 구체적인 통계를 공개하고 있다.
이어 세브란스병원의 오래된 ‘순혈주의 문화’는 단순한 수치로만 판단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9년에는 세브란스병원 전공의들이 담당 교수에게 폭언‧폭행을 당한 사실을 세상에 고발하며 "특정 교수는 ‘지방대 출신이라 제대로 못한다. 머릿속에 뭐가 들었냐’ 등의 폭언을 일삼았다“고 호소했다.
서울아산병원도 미달 성적표를 건네받았다. 라이벌로 여겨지는 삼성서울병원은 이번 모집에서 1.16:1이란 무난한 경쟁률을 기록해 더욱 속이 쓰린 상황이다.
서울아산병원과 삼성서울병원을 고민하는 의대생들의 선택을 가른 이유 중 하나로는 먼저 ‘급여’가 꼽힌다.
대한전공의협의회가 실시한 ‘2021 전국 수련병원평가’에 따르면 서울아산병원의 월평균 급여는 380만원 수준으로 조사됐다. 삼성서울병원은 이보다 조금 높은 420만원 가량의 급여를 매달 지급했다.
연간 상여금에선 더욱 격차가 났다. 서울아산병원 소속 전공의들은 지난 한 해 평균 300만원 수준의 상여금을 받은 데 비해, 삼성서울병원의 연평균 상여금은 400만원을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두 병원 모두 합격할 자신이 있는 최상위권 성적의 의대생들은 마지막 순간보다 높은 급여를 지급하는 병원을 선택했단 것이다.
이어 상위권 학생들의 경우 “서울아산병원은 서울대출신을 선호하고 키워준다”란 ‘속설’이 나돌면서 많은 학생들이 지원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온다.
실제로 레지던트 비중을 살펴보면 서울아산병원은 삼성서울병원보다 서울대 출신이 다소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두 병원이 이번 전기 모집에서 사용한 홍보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서울아산병원의 서울대 출신 전공의는 인턴 1명 레지던트 10명이다. 삼성서울병원의 서울대 출신 전공의는 2021년 기준 인턴 0명, 레지던트 5명이다.
인원수 자체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단 한 명의 정원이 아쉬운 인기과 TO가 2~3명 사이인 것을 고려하면 이같은 차이가 지원자들에겐 유의미하게 느껴졌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물론 서울아산병원의 특정 학교 선호는 항간의 소문이란 시각도 있다.
서울아산병원에서 수련을 받은 전문의 C씨는 “경험자로서 얘기하면 인턴과 레지던트 선발은 정말 힘들었닫.. PT 발표 등 여러 시험을 꼼꼼하게 치르고 합격자들을 선발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인기과 레지던트 중에는 각 의대 수석출신이 많았고, 실력만 있다면 출신교로 차별받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당사자인 의대생들의 생각은 어떨까. 이들은 이번 서울아산병원의 충원실패가 단순한 ‘눈치싸움’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올해 의사국시를 치른 수도권 의대생 D씨는 “서울아산병원과 삼성서울병원 등은 선망의 대상으로 항상 수요가 있다. 서울아산병원 미달은 대학 입시 때도 종종 일어나는 원서싸움의 우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이어 “최상위권 성적이 아닌 의대생의 경우 원하는 전문과목 선택을 위해 하향지원 하는 경우도 많다. 실제 공부 잘하는 선배들이 아산이나 삼성에 가면 선호도가 높지 않은 전문과목을 전공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전문과목>병원 간판’…공정성 대두되면서 공공병원 급부상
젊은의사들이 '병원' 보다 '과목' 선택에 비중을 두며 과거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공공병원에 대한 인기가 급부상했다.
수도권의 공공병원은 병원시설이나 수련환경 등이 대학병원과 비교했을 때 크게 나쁘지 않고, 특정 학교 출신이 쏠리지 않기 때문에 훗날 전공의 과 선택에 있어서도 공정성이 더욱 담보된다는 시선이다.
이번 2022년도 인턴모집에서 가장 지원자가 폭증한 곳은 국립중앙의료원(NMC)으로 정원 28명에 지원자는 2배가 넘는 65명이 몰려 경쟁률 2.32대 1을 기록했다.
공공의료 중추를 담당하는 국립중앙의료원의 평균 인턴모집 경쟁률은 정원을 살짝 웃도는 수준으로, 지난해 2차 모집에서 20명 모집에 33명이 지원했으며, 2020년은 28명 모집에 나섰지만 지원자는 27명에 그쳤다.
하지만 NMC는 지난 2014년 인턴모집에서 32명 정원에 지원자 45명이 몰려 1.44대 1로 빅5보다 높은 경쟁률을 기록한 바 있다.
서울시 강동구에 위치한 중앙보훈병원 또한 2022 인턴모집에서 27명 모집에 46명이 지원해 경쟁률 1.7으로 마감했다.
중앙보훈병원의 인턴모집 예년 평균 경쟁률이 정원보다 지원자가 조금 더 많은 1.1~1.2:1 수준인 것을 고려하면 올해 유난히 많은 지원자가 몰린 셈이다.
병원들은 이 같은 현상에 대해 ‘공정성’을 중시하는 젊은의사들의 특성이 반영됐다고 설명했다.
중앙보훈병원 관계자는 “공공병원이라는 점이 영향을 주지 않았나 생각한다”며 “공공병원으로 다양성이 존재하는 만큼 의사소통이 합리적이고 서로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인턴들은 전공과목 선택을 중요하게 여긴다”며 “공공병원은 특정 대학에 편중되지 않고 다양한 출신이 어우러져 전문과목 선정에 있어서도 조금 더 공정한 기준으로 평가된다는 분위기가 있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그는 “코로나19 장기화로 수련 질 저하가 전공의들 사이의 이슈 중 하나인데 전담병원이면서도 재활센터나 암센터 등을 운영해 타병원에 비해 많은 다양한 진료과목을 보유하고 있어 인기가 높다”고 전했다.
국립중앙의료원은 특히 18년 동안 답보상태였던 신축이전 사업이 최근 부지 확정이 결정되는 등 진전을 보인 것도 젊은 의사들의 선택에 영향을 준 것으로 분석됐다.
한 전공의는 “국립중앙의료원 신축이전이 완료되면 좋은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된다”며 “당장 인턴을 보낼 때는 혜택을 받지 못하더라고 향후 취칙과 의료원 전망 등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말했다.
코로나19 전담병원은 코로나19 환자에 집중하기 때문에 다른 진료과목은 상대적으로 업무부담이 줄어 지원이 늘었다는 분석도 있었다.
대한전공의협의회 관계자는 “전담병원은 아무래도 특정 환자에게 집중하다 보니 수술이 많은 과 등 일부과는 예년에 비해 업무가 줄어든 부분이 있다”며 “이러한 부분이 이번 인턴모집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