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장(腸)의 미생물 중에는 건강에 이로운 종도 있지만, 질병을 일으키는 것도 없지 않다. 장 세균이 관여하는 병은 자가면역 질환, 염증성 장 질환, 대사 증후군, 신경정신 질환 등 의외로 많다.
이른바 '새는 장'(leaky gut) 가설은 장 세균의 질병 유발 과정을 설명하는 이론적 틀로 널리 알려졌다. 해로운 세균이 장을 벗어나 갖가지 질병으로 이어지는 만성 염증 반응을 촉발한다는 게 이 가설의 핵심이다.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는 따로 있다. 어떻게 해서 장을 탈출한 병원성 세균이 수십 년간 숨어 지내느냐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세균은 사람의 몸 안에 오래 머물면서 건강에 아무런 문제도 일으키지 않는다. 마침내 의학계의 이런 해묵은 의문을 풀 수 있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연구진은 '숙주 내 진화'(within-host evolution) 현상을 틀로 삼아 어떻게 장 세균이 다른 기관에 질병을 일으키는지 설명했다.
장 세균이 장기간의 진화를 거쳐 장의 방어벽을 넘어가는 능력을 갖추면 병원성이 더 강한, 다시 말해 질병을 일으킬 위험이 더 큰 세균으로 변한다는 게 요지다.
이런 세균은 장 밖의 다른 기관으로 이동한 뒤 면역계 감시망을 피해 숨어 있다가 만성 염증과 여러 가지 관련 질병을 일으켰다.
미국 예일대 의대 노아 팜 면역학 부교수팀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13일(현지 시각) 저널 '네이처'(Nature)에 실렸다.
연구팀은 장 미생물이 아예 없는 무균(germ-free) 생쥐 모델에 잠재적 병원성을 가진 세균 한 종을 감염시켰다. 시간이 지나자 세균은 확연히 구분되는 두 개의 그룹으로 갈라졌다. 한 그룹은 원래의 세균 종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미세한 DNA 돌연변이가 생긴 다른 그룹은 장의 내벽 상피에서 주로 발견됐고, 장을 벗어난 뒤엔 림프절과 간에서도 오래 살았다.
림프절과 간에 생긴 소규모 세균 콜로니(colonyㆍ菌落)는 기존의 병원체와 달리 반 은폐 상태를 유지하면서 면역계의 감시를 피했다.
하지만 이들 콜로니가 계속 잠행 모드로 가지는 않았고 결국엔 자가면역 질환과 같은 염증성 이상 증세를 일으켰다. 이런 유형의 잠재적 병원성 세균에 감염되면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이가 들면서 질병에 걸릴 위험이 커진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세균의 병원성이 강해지게 부추기는 요인으론 '숙주 내 진화'가 지목됐다. 인간이 평생 살아가는 동안 장에 공생하는 세균이 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진화하는 이유도 이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연구팀은 '숙주 내 진화' 곡선에 변곡점을 만드는 환경적 요인이 세균의 질병 촉발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예컨대 건강에 좋은 음식을 꾸준히 섭취하면 장 미생물 총의 다양성이 높아지고 공간과 영양분 등을 더 많이 차지하려는 세균 종간의 경쟁이 치열해진다고 한다.
그 결과, 특정 균락의 크기가 제한되고 잠재적 병원성 세균 종이 진화해 장을 탈출할 확률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장 미생물 총의 구성이 다양하지 못하면 해로운 세균 변종이 생길 위험은 커질 수 있다.
팜 교수는 "세균이 장 밖의 기관에 오래 머물려면 미리 적응 과정을 거쳐야 한다"라면서 "비병원성 세균 종의 우선적 전염(preferential transmission) 때문에 숙주가 바뀔 때마다 진화 과정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여튼 장에서 세균의 행동 패턴이 구체화할 때 '숙주 내 진화'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는 게 새로운 치료법 개발의 열쇠라고 팜 교수는 강조했다.
이 과정을 제한하거나 진행 방향을 돌릴 수 있으면, 다양한 '새는 장' 관련 질환의 발생도 차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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