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전신마취법의 발견은 인간에게 의학적 기적이자 큰 행운이다.
1846년 첫 시술 이후 수많은 환자가 고통 없이 전신마취 수술을 받아 생명을 건졌다. 그러나 전신마취 환자의 뇌가 어떻게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규명되지 않았다.
의학계의 지배적인 이론은, 마취제가 정상적인 뇌의 활동을 억제해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마취와 유사한 수면 상태가 또한 그럴 것이라는 이론도 제기됐다. 하지만 뇌의 일부 신경세포 군은 잠자는 동안에도 온전히 활성 상태를 유지한다는 게 지난 수십 년간의 연구결과다. 사정이 이러니 마취와 수면의 상관관계도 분명하지 않았다.
미국 듀크대 의대 과학자들이 전신마취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낸 것 같다.
기존 학설과 달리 뇌 시상하부의 작은 신경세포(뉴런) 군은 마취 상태에서 활성화해 통증 감각을 제어하는 것으로 관찰됐다. 몇몇 종류의 마취약이 이 '수면 유도' 신경 회로를 장악해 환자의 의식을 잃게 한다는 것도 확인됐다.
18일(현지시간) 온라인(www.eurekalert.org)에 배포된 보도자료에 따르면 이 대학의 왕 판 신경생물학 교수팀은 이런 내용의 연구보고서를 저널 '뉴런(Neuron)' 온라인판에 발표했다.
이번 연구는 마취가 뉴런 기능을 억제한다는 주류 학설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됐다.
연구팀은 흔히 쓰는 몇 종류의 마취약을 생쥐에 투여하고, 전신마취 상태에서 활성화하는 뉴런들을 분자 표지로 추적했다.
그 결과 시상하부의 시신경 교차 부위에 숨겨져 있는 시삭상핵(supraoptic nucleus)의 뉴런들이 강한 흥분 상태에 있는 걸 발견했다. 이 신경핵의 돌기에선 바소프레신과 같은 신경성 뇌하수체 호르몬이 다량 혈류로 분비된다.
연구팀은 "놀랍게도 마취 상태에서 활성화하는 뉴런은 대부분, 신경계와 내분비계를 아우르는 일종의 잡종 세포(hybrid cell)였다"면서 "이런 발견이 전신마취의 신경 경로를 이해하는 미답의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연구팀은 자체 개발한 첨단 기술로 시삭상핵 뉴런을 '온·오프' 하면서 변화를 관찰했다.
뉴런의 스위치를 켜자 생쥐는 동작을 완전히 멈춘 뒤 무의식 상태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서파수면(느린 뇌파의 깊은 수면)에 빠졌다. 반대로 뉴런의 스위치를 껐더니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잠들지 못했다.
또한 인위적으로 시삭상핵을 미리 활성화하면 약으로 유도한 전신마취 상태가 더 오래 유지되고, 비활성 상태로 돌리면 전신마취가 쉽게 풀렸다.
호르몬을 분비하는 시삭상핵 뉴런이 깊은 수면을 유도하는 예상 밖의 역할을 한다는 것도 의미 있는 발견으로 평가된다.
이런 성과가 개선된 수면제 개발로 이어져, 알츠하이머병 환자 등 수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부담 없이 쓰게 되기를 연구팀은 기대한다.
연구팀의 한 과학자는 "신경 회로를 조작하는 방법만 알아내면 호르몬이나 펩타이드를 표적으로 삼아 부작용이 줄어든 수면제를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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