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연합뉴스) 손현규 기자 = 2018년 5월 중순 초등학교 교사인 A(사망 당시 38세·여)씨는 허리 통증으로 경기도 부천의 한 상가 건물 3층에 있는 한의원을 찾았다.
진료를 맡은 한의사 B씨는 "요추 부위에 염증이 있다"며 일반적인 침을 놔줬다.
그는 이틀 뒤 다시 한의원을 방문한 A씨에게 이번에는 봉침을 처치했다. 평소 자주 쓰는 봉침에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효소를 제거한 침이었다.
그러나 A씨는 봉침을 맞고서 10분 뒤 발열과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고 "머리가 뜨겁고 호흡이 불편하다"고 간호조무사에게 호소했다.
간호조무사로부터 이 같은 보고를 받고 당황한 한의사는 같은 층에 있는 가정의학과 의원에 찾아가 의사 C씨에게 "응급처치를 좀 해달라"며 도움을 요청했다.
C씨는 3분 뒤 수은 혈압측정기와 청진기를 들고 한의원에 가서 A씨 상태를 확인했다.
당시 A씨는 극심한 저혈압 상태는 아니었지만 신음을 하다가 멈추고선 입가에 침을 흘리고 있었다.
C씨는 재차 자신의 병원에 가서 항알레르기 응급치료제인 '에피네프린'을 가져와 A씨에게 투여했고 동시에 심폐소생술도 했다.
그 사이 B씨 신고로 119구급대가 도착해 A씨를 인근 종합 병원으로 옮겼지만 그는 혼수상태로 사경을 헤맨 끝에 사고 발생 22일 만에 숨졌다. A씨는 중증 알레르기 반응인 아나필락시스(anaphylaxis) 쇼크로 숨진 것으로 확인됐다.
과민성 쇼크로도 불리는 아나필락시스 쇼크는 호흡곤란과 혈압 저하를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A씨 남편과 부모 등 유가족 3명은 A씨가 사고 없이 정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을 때의 합산 소득 등을 계산해 B씨와 C씨를 상대로 총 9억원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이 민사소송은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2부에 배당됐다. 민사2부 재판장은 공교롭게도 의사 출신 노태헌 부장판사였다.
그는 1992년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서 4년 뒤에는 서울대학교 병원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도 수료했다. 이후 1998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사법연수원을 30기로 수료하고 줄곧 판사로 일했다.
법조계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의사 출신 판사는 이번 사고와 관련해 한의사에게 과실이 있다고 판단했다.
인천지법 부천지원 민사2부는 유가족 3명에게 총 4억7천만원을 지급하라고 B씨에게 명령했다.
재판부는 "피고는 부작용이 발생하는 상황에 대비한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며 "응급조치를 시행할 수 있는 병원과 협진체계도 마련하지 못한 상황에서 시술한 과실 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 사고는 A씨 유가족이 응급처치를 도운 C씨를 상대로도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면서 의료계 안팎에서 논란이 일었다.
선의의 목적으로 응급처치를 도와준 C씨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느냐를 놓고 유가족과 의사단체의 입장이 엇갈렸다.
유가족 측은 C씨가 골든타임인 4분 이내에 에피네프린을 투여하지 못해 의사에게 주어진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일반인에게 요구되는 정도의 주의의무)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응급 상황에서 생명 구조라는 선의의 목적으로 한 의료 활동에 대해 과실을 물을 수 없다고 맞섰다.
재판부는 C씨에 대해서는 "심장마사지 등 필요한 응급조치를 다 했다"며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만으로는 C씨에게 어떤 의료과실이 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설령 C씨에게 의료과실이 있더라도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에 따라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한 민사 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5조 2항은 응급의료 종사자가 아닌 이가 생명이 위급한 응급환자를 처치하다가 발생한 재산상 손해, 사망, 부상에 대해서는 고의나 중대한 과실이 없는 경우 민사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박종혁 대한의사협회 총무이사 겸 대변인은 23일 "부탁을 받고 응급처치를 도운 의사를 상대로 소송이 제기된 자체가 사회적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며 "제도나 판결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데 이번 소송으로 의사들이 위급한 상황을 목격하고도 주저할까봐 우려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인지상정"이라며 "당연한 판결이 나온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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