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치료제 처방권을 결국 타과와 공유하게 된 정신건강의학계가 입을 열었다.
정신건강의학과를 제외한 타과가 오랫동안 열망해온 우울증 치료제인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SRI) 처방권 확대가 12월 1일부로 이뤄진 가운데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가 7일 "확대해석을 경계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정부의 이번 권고가 결코 우울증을 비전문의에게 치료받으라는 의미는 아니다"며 타과들이 환호하는 분위기에 우려감을 드러낸 것이다.
보건복지부가 최근 마련한 SSRI 급여기준 합의안에 따르면 특별히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신경과, 내과, 소아청소년과, 가정의학과, 산부인과 등 非정신건강의학과도 정신건강의학과 자문 없이 SSRI를 반복처방할 수 있게 됐다.
원래는 비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우울증상이 지속적으로 2주 이상 계속되는 경우 상용량으로 60일 범위 내 ▲해당 기준보다 용량 또는 기간을 초과해서 SSRI를 투여할 경우 정신건강의학과로 자문의뢰하는 경우 등에서 급여가 인정됐다.
때문에 정신건강의학과 문턱이 높았던 현실에서 우울증 치료 접근성이 향상된 것처럼 비춰지며 환자들 뿐 아니라 SSRI 보유 제약사 등 업계에서는 활기가 도는 분위기였다.
의사회는 "우울증 치료제 처방을 비전문의에게 받으라는 의미가 아닌데 각자 아전인수격으로 유리하게 왜곡하는 사람들이 같은 의료계에 있다니 참 안타깝다"고 유감을 표했다.
오히려 이번 합의안으로 정신건강의학과에 환자를 의뢰해야 하는 경우가 더 분명해졌다는 게 의사회 입장이다.
의사회는 "일차성 우울증의 경우 정신건강의학과에서 SSRI 처방을 받으라는 권고는 여전하다"며 "신체적 질병에 의한 우울증일 경우 기존 60일 처방 제한을 풀고 해당과에서 계속 진료를 받아도 되도록 변경됐다"고 짚어냈다.
물론 후자의 경우도 자·타해 위험이 있거나 증상 조절이 안 되는 경우 정신건강의학과로 의뢰해야 하는 점은 변함 없다.
특히 ▲자살계획이 있는 경우 ▲정신병적 증상이 있는 경우 ▲증상이 심하고 심한 불안이 동반된 경우 ▲자기 관리가 심하게 안 되는 경우 ▲타인을 위험하게 할 수 있는 경우 등은 지체없이 의뢰해야 한다.
의사회는 "오히려 이번 합의안으로 불가피하게 SSRI를 처방하는 타과 의사들도 정신건강의학과 의뢰 기준에 대해 더 명확히 인식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며 "또 그럴 준비가 돼 있는 것이라 믿고 싶다"고 둘러 일침했다.
항우울제 처방은 우울, 불안에 대한 환자의 자기 인식과 전문가 판단이 조화를 이룰 때 정확한 처방이 이뤄진다는 게 의사회 시각이다.
의사회는 "환자와 의사의 합의는 상당히 미묘한 영역이기에, 정신건강의학과의 진단과 치료과정에 대해 타과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우려를 표했다.
"SSRI 처방 확대가 과연 OECD 자살률 국가 오명 벗길까"
그간 신경과 등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SSRI 처방권 확대의 근거로 사용해왔다. 즉 "SSRI 처방권을 확대하면 우울증 치료를 향상시킬 수 있다"는 논리였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회는 "과연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라며 "전문의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전문과목에 관계없이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조치가 환자를 위한 일이라고 하는데 이득을 보는 게 국민일까, 의사들일까. 치료를 앞당길까, 늦출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우울증 치료 환경의 본질적인 문제는 항우울제의 처방권이 아니라, 낙인처럼 존재하는 사회적 분위기라는 지적이다.
실제 SSRI 처방을 위해서는 'F' 코드 질병을 붙여야 하는데, 이것이 환자에게 낙인처럼 작용해 과거 보험사로부터 가입과 보장 측면에서 차별을 받은 사례도 있다는 전언이다.
이는 "정신건강의학과에 가면 인생을 망친다"는 부정적 시각이 존재했던 이유와도 연결된다.
의사회는 "F코드는 특별히 무서운 것이 아니라 경증부터 중증까지 정신건강 관련 모든 질병이 해당한다"며 "타과에서도 결국 그 무서운 F코드를 붙여야 SSRI를 처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정신건강의학과에 가지 않아도 약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F코드는 그대로 붙어있다면 환자들이 어떻겠냐"며 "타과에 가도 전혀 해결되는 게 아니다"고 바로잡았다.
의사회는 "수많은 곳에서 낙인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다고 유혹하며 환우나 가족에게 상처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고 반성하며 "정신건강의학과 문턱이 높은 현실에 대해 책임을 통감한다. 무거운 마음으로 진료에 임하겠다"고 피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