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증원 사태 이후 정부가 연일 핵폭탄급 정책을 쏟아내고 있지만 구심점 없는 의료계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참담한 현실을 마주하는 모습이다.
통상적이라면 의료계 지축을 흔들 민감한 정책이 즐비하지만 의대 증원 사태 속에 내부 균열 조짐까지 드러내며 전혀 방어에 나서지 못하는 형국이다.
실제 지난달 20일 이후 정부는 △간호사 일부 의료행위 허용 △비대면 진료 전면 허용 △의료전달체계 개편 △행위별수가 전면 개편 등의 굵직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이들 사안 모두 그동안 의료계가 격렬하게 반대했던 정책이지만 정부는 이번 의료공백 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거침없이 추진 중이다.
시발점은 PA(Physician Assistant) 간호사 존재의 공식화였다.
정부는 전공의 이탈에 따른 의료공백 해소를 위해 법적 근거가 없던 PA 간호사를 ‘전담간호사’로 명명하고, 업무 기준도 제시했다.
해당 지침은 간호사를 △일반간호사 △전담간호사(PA) △전문간호사 등 3가지로 구분해 응급심폐소생, 약물 투입 등 100여개 행위에 대한 수행 가능 여부를 명시했다.
예를 들어 혈액 검체 채취·배양 검사는 모든 간호사가 할 수 있지만 응급상황에서 동맥혈 채취, 수술 부위 봉합 등은 전문간호사와 전담간호사만 가능토록 했다.
여기에 윤석열 대통령이 직접 PA 간호사 제도화 의지를 천명하면서 사실상 그동안 병원계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PA 양성화' 가능성이 높아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근 “숙련된 진료지원 간호사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해 근본적인 의료전달체계 개편을 함께 추진해 나가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의료계 반대를 의식해 상당히 보수적 접근을 시도하던 비대면 진료의 빗장도 완전히 풀었다.
정부는 지난달 23일부터 별도 신청이나 지정 없이 희망하는 의원·병원 등 모든 의료기관에서 비대면 진료를 전면 허용했다.
의사가 안전하다고 판단한 경우 초·재진 모두 비대면 진료를 실시할 수 있다. 아울러 비대면 진료·조제 실시비율 30% 제한과 동일 의료기관에서 환자당 월 2회 초과 금지 규정도 없앴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이번 사태를 의료계의 고질적 문제인 의료전달체계 개혁의 계기로 삼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상급종합병원(3차 병원) 문턱을 높여 경증 환자의 무분별한 대형병원 이용을 제한하는 의료전달체계 개선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현재는 1차 병원에서 진료의뢰서를 받으면 3차 병원 진료가 가능하지만, 앞으로는 2차 병원의 진료의뢰서가 반드시 있어야 3차 병원에 갈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
의료공백 미명 하에 간호사 의료행위 허용, 완전히 빗장 풀린 비대면 진료
행위별 수가제의 대대적인 수술도 예고됐다. 현행 5~7년 주기로 운영되는 상대가치점수 개편 주기가 2년으로 단축되고 사안에 따라 상시 조정할 수 있는 체계로 개편될 전망이다.
정부는 행위별 수가 제도의 한계를 극복하고, 건강보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상대가치 수가 제도를 개편한다는 방침이다.
그동안 상대가치 점수 결정의 핵심인 업무량 산정 권한을 대한의사협회가 맡아 왔지만 내부 조정에 실패하면서 진료과목 간 불균형이 심화됐다는 게 정부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정부가 직접 업무량을 산정하거나 학회 등 다른 전문가 단체로 이양한다는 계획이다.
뿐만 아니라 상대가치 개편 주기도 5∼7년으로 길어 의료환경 변화를 신속하게 반영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따라 앞으로는 개편 주기를 2년으로 줄이기로 했다.
특히 상대가치 제도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 의사 대기시간, 업무 난이도, 위험도 등 필수의료 특성을 반영한다는 복안이다.
행위별 수가는 단순히 진료시간과 자원 소모량 등을 바탕으로 가격을 설정하고 행위량이 늘수록 수익이 늘어나는 구조다.
이에 따라 서비스량이 적은 분야에서 보상이 부족해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꺼리는 결과를 낳는다는 지적이 많았다.
'대안적 지불제도'는 중증·필수의료에 들어간 비용을 사후에 보전하는 제도다. 얼마나 진료했냐가 아닌 의료의 질, 환자의 건강 상태 등에 따라 보상을 달리 제공한다.
정부는 대안적 지불제도를 위해 '지역참여형 혁신 계정'을 마련한다. 기존 지방자치단체 사업을 연계한 성과 보상 모형을 개발하고 여기에 7000억원 이상을 투자한다.
예를 들어 각 지자체에서 지역주민 건강 성과를 개선하려는 여러 사업 가운데 성과가 좋은 사업을 전국에 확산하려 할 때 이를 수가로 지원하는 것이다.
또 안전한 혁신 기술의 신속한 현장 적용을 위해 '기술검증형 혁신계정'을 마련하고, 5000억원 이상을 투자한다.
제약회사 등에서 경제적 이익을 받은 의사의 실명 등이 포함된 지출보고서 공개도 추진된다.
지출보고서 제도는 제약사, 의료기기 회사 등이 의료인에게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 내역을 서류로 정리하고 이를 보관하는 제도로 거래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지난 2018년 시작됐다.
올해부터는 경제적 이익을 제공한 자(제약사)와 받은 자(의사)의 명단이 공개된다.
다만 경제적 이익을 제공받은 의사의 실명 노출은 개인정보를 침해할 뿐 아니라, 사실 적시에 따른 명예훼손 등이 적용될 가능성이 있는 만큼 법률자문을 구한 상태다.
이처럼 중차대한 정책이 잇따라 시행 또는 예고되고 있지만 의료계는 제대로된 저항조차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의료계 종주단체인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공석 상태이고,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운영진의 경찰 조사와 함께 면허정지 처분까지 내려지는 등 소용돌이 속에 빠진 상황이다.
특히 대통령실이 대한의사협회의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사실상 이번 의과대학 정원 논란 해결을 위한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의과대학 교수사회도 전국조직, 비대위 조직, 학장단체 등으로 나눠져 각각 활동하는 등 정책 광풍을 막아낼 전열을 갖추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 의료계 원로는 “정부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그동안 미뤘던 정책 과제를 모두 풀려는 모양새”라며 “중차대한 정책 변화에 의료계는 제대로 된 목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