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O병원에 납품하는 회사라는 명분만 있지 사실 언제 망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병원에서 사용한 만큼 정산을 해줘야 하는데 제대로 대금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최근 데일리메디와 만난 중소 의료기기 업체 A사 대표 하소연이다. A사 대표는 의료기기 업계 오랜 관행으로 굳어진 '가납'으로 인해 부실 경영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고 호소했다.
가납이란 의료기관이 사용할 물품을 미리 창고에 가져다 두고 사용한 만큼만 대금을 지불하는 간납사 재고관리 방식이다. 이를테면 의료기기 업체가 수술방 치료재료 100개를 납품하고 병원에서 사용한 20개만 대금을 받는 형태다.
여기서 간납사는 간접납품회사의 줄인 말로 의료기관과 업체 중간에서 구매계약과 세금계산서 발행 등 구매업무를 대행하는 업체다. 병원 납품에 대한 관문 역할을 하며 일정 수수료를 통행세 형식으로 징수하는 회사를 칭한다.
문제는 가납으로 병원 측에서는 재고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업체 입장에서는 재고 관리와 유통기한 관리 및 손망실에 따른 책임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불공정거래 중 하나지만 '관습'이라는 이유로 묵인되고 있다.
실제 A사의 경우 가납으로 인해 지난해 5억원이 넘는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A사 대표는 "사용 후 재고 수량 파악을 전적으로 병원에 의존해야 하는데 병원에서는 '분실했다'거나 '왜 수량이 안 맞는지 모르겠다'라는 답변만 하니 모든 손해를 떠안을 수 밖에 없다"고 답답한 심정을 전했다.
특히 그는 "작년 한해 동안 10억원어치 물품을 여러 병원에 납품했는데 현재 결제받은 금액은 3억원에 불과하다. 남아있는 재고도 2억원 뿐이라 5억원어치 물품은 공중분해된 상태"라고 울분을 토했다.
그러면서 "규모가 작은 회사일수록 당장 납품이 아쉬워 손망실 책임을 고스란히 감내하고 있다. OO병원에서 사용되는 제품이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납품을 감행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불만을 토로하면 '병원에 납품하겠다는 회사는 넘쳐나니 알아서 판다하라'며 적반하장으로 나오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 다른 의료기기 업체 B사 임원은 "대부분 간납사는 관문이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통행세 형식 수수료만을 징수하고 가납으로 인한 손해는 모두 공급업체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고충을 전했다.
특히 B사 임원은 "이미 '갑을 관계'가 형성된 상황에서 간납사의 만연한 갑질을 신고하기란 어렵다"며 "돈이 오고가는 거래인데도 계약서 자체를 작성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러다 보니 수년째 반복되는 불공정한 거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의료기기 대리점 표준계약서 도입했지만 법적 강제력 없어 '실효성 무(無)'
계약서 작성 요구하면 병원들이 거래 중단…"현장상황 반영 제도적 보완 시급"
이 같은 의료기기 업계 신음은 이미 공정거래위원회에 전달된 바 있다.
공정위는 지난 2016년 '경쟁제한적 규제 개선 간담회'를 통해 간납업체 불공정 행위를 파악하고, 관계 부처와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이렇게 내놓은 장치가 2021년 도입된 '의료기기 대리점 표준계약서'다.
표준계약서는 건전한 거래질서를 확립하고 거래지위상 우위를 이용한 불공정한 약관 등에 대한 피해를 막고자 거래 당사자 간 기준을 설정하는 역할을 한다.
표준계약서가 등장하면서 업계 고충도 해결되는 듯했으나 도입 4년이 지나도 현장 반응은 미지근하다. 법적 강제력이 없다 보니 실질적으로 미치는 영향력은 적다는 게 그 이유다.
특히 계약서 작성을 요구했다가 자칫 밉보이기라도 하면 거래가 끊기는 경우도 많아 언급조차 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제품 할인 요구, 담보 미제공, 대금결제 지연 등은 폐단은 덤이다.
의료기기산업협회도 오래 전부터 유통구조개선TF를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불공정거래 폐해를 주장해 왔으나 제도 개선을 위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와 관련, 의료기기산업협회 관계자는 "표준계약서가 그저 권고에 미치다 보니 현장에서는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라며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실질적인 법과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