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무죄가 속출하는 이변은 없었다. 동아ST로부터 비교적 소액(1000만원 가량)의 대가성 금품을 수수한 의사 90명에 대해 사법부는 사실상 전원 유죄를 선고하며 리베이트 척결 의지를 분명히 했다.
90명 중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은 P씨만이 동영상 리베이트와는 무관한데다 물품 구매 책임자와 동아ST 직원 간 현물 수수를 전혀 인식하지 못했음을 입증해 가까스로 범법자 오명을 벗었을 뿐이다.
재판부는 지금껏 리베이트 수수 의사들이 주장해왔던 무죄 논리들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꼼꼼하게 선고문을 읽어나갔다.
무려 89명(무죄 1인 제외) 피고인들의 유죄 취지 및 양형 근거를 하나하나 빠짐없이 명확히 지적하며 '동영상·설문조사 금품제공이 불법 리베이트인 이유'를 빈틈없이 공개했다.
이번 판결이 갖는 의미는 "의사들이 리베이트라고 인식할 만한 구체적·직접적 근거가 없다 하더라도 정황상 '미필적 인지'가 적용된다면 뇌물 비리라고 봐야한다"는 사법부 논리를 한층 선명하게 천명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제약산업 내 뿌리깊은 폐습으로 자리잡은 대가성 의약품 처방촉진 범죄를 사법부가 한치 남김없이 뿌리 뽑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지금까지 동아ST 공판에서 꾸준히 굳어져 온 쟁점은 ▲의사 리베이트 인식 여부 ▲동영상·설문조사 비용의 법리적 합법 여부 ▲강의료 수령 후 해당 의약품 처방량 증감 여부 ▲강의 및 설문조사 품질 대비 강연료 비례 여부 등이었다.
89명 의사들의 변호인은 "의사는 리베이트인지 전혀 몰랐고, 동아ST 직원이 법적으로 자문을 받아 아무런 불법 소지가 없는 동영상 촬영이라고 판단했다"고 줄기차게 주장해왔다.
또 의사들은 "강의료 수령 이후에도 해당 의약품 처방량이 줄었기 때문에 대가성이 없고, 의약품이 판매촉진된 사실이 없으므로 죄를 물을 수 없다"며 "강의에 들인 시간과 노력은 편당 300만원을 받을 만큼의 품질이었다"고 강력히 항변하며 억울함을 호소해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 31단독 송영복 판사는 의사 측 주장의 논리를 완벽히 무너뜨리고 전원 벌금형 및 추징금을 확정했다.
"동영상 강의, 불법 의심됐다면 의사가 직접 법률자문 받았어야"
법률자문을 근거로 "동영상 강의는 불법 리베이트가 아닌 합법"이라는 동아 측 설명을 믿고 촬영했으므로 죄가 없다는 의사들의 항변을 재판부는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송영복 재판장은 "영업사원이 법무법인 자문을 근거로 합법이라고 설명했다고 해서 동영상 리베이트의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며 "의사는 실제로 해당 강의가 위법인지 여부를 스스로 다른 법률자문을 추가로 듣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동영상 강의·설문조사·인터넷 배너광고 등의 집행 과정을 스스로 객관적으로 판단해 불법성 여부에 따라 계약에 응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재판부가 강의료·설문조사료·광고료 전부를 불법 리베이트로 확정짓는 내용에 해당된다.
특히 재판부는 지난해 9월 2000만원 이상 비교적 고액 동영상 리베이트 수수 의사들의 고등법원 항소심 판결에 적용된 '미필적 인지' 논리를 그대로 차용했다.
즉 리베이트에 대한 의사 인식 여부를 판가름 할 직접증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금원의 출처, 동영상 강의 품질, 촬영 후 수강 여부 확인, 계약 과정 등 다양한 정황을 결합할 때 의사가 미필적으로나마 '강의료=의약품 처방 대가성 리베이트'의 등식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뇌물 비리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송 재판장은 "의사들은 주된 목적이 강의라고 주장하나, 강의 주제를 먼저 선정하고 의사를 모집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를 먼저 선정하고 그 의사가 할 수 있는 강의를 촬영하는 수준에 그쳤다"며 "강의 품질은 편당 300만원을 받을 정도의 수준이 아니었고 설문조사 내용의 경우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설문인지 알기 힘들 정도로 내용이 빈약했다"고 밝혔다.
이어 "여러 정황상 결국 의사들은 미필적으로나마 지급되는 금원이 리베이트 성격이라는 것을 인식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약품 처방·촉진' 구체적 의미 정립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재판부가 의약품 처방·촉진 의미에 대해 구체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사 측 변호인들은 리베이트에 대해 "의약품 처방 증대를 목적으로 지급하는 것이 리베이트인데, 동영상 강의료를 받고 처방량이 줄었으므로 대가성이 있었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해왔다. 즉, 돈을 받고도 동아ST 의약품 처방량이 늘지 않았으므로 불법으로 볼 증거가 없다는 논리다.
재판부는 위 논리를 정면 반박했다. 심리를 맡은 송영복 재판장은 "의료법에 의거해서 판매촉진 여부는 단지 의약품 처방량의 증가·감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채택여부까지 포함된다"며 "강의료 수령 후 해당 의약품 처방이 늘어났는지 여부는 상관없다"고 못박았다.
송 재판장은 "판매·촉진은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 절대적인 의약품 양을 많이 처방해 달라는 것이 대표적인 판촉행위이지만, 동아ST 의약품 외 다른 기업의 약품 출시로 불가피하게 처방량을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축소폭이 작아지는 등 영향을 미친다명 이것 역시 불법 판촉행위"라고 적시했다.
즉 시장 내 동아ST와 유사한 의약품(제네릭 등)을 처방할 수 있는 상황에서 동영상 강연을 촬영한 의사들이 동아ST 의약품을 처방했다면 이는 명백한 불법 판촉에 따른 리베이트 행위라는 설명이다.
법무법인 청파 장성환 변호사는 "무죄를 받은 1인의 경우 이번 동아 동영상 리베이트 사건과는 쟁점 자체가 일치하지 않는 아예 상이한 케이스"라며 "이번 판결 역시 고액 리베이트 수수 판결에 적용된 고등법원 논리가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미필적·확정적 고의 여부를 재판부가 면밀히 검토한 것으로 해석된다"고 전했다.
한편 89명 의사들의 항소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된 바 없으나, 사실상 무죄에 가까운 '선고유예' 판결이 앞서 고액 리베이트 고등판결에서 난 바 있는 만큼 다수 의사들이 항소를 제기할 확률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