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한기천 기자 = 췌장암은 5년 생존율이 10%에 불과한 치명적인 암 중 하나다. 췌장암이 이렇게 위험한 건 무엇보다 다른 부위로 걷잡을 수 없게 전이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췌장암 전이 속도를 늦추거나 전이 자체를 중단시킬 수 있는 '분자 경로'가 발견됐다. 문제를 일으키는 건 단백질 내 아미노산의 산화 손상을 복구하는 일명 '지우개 효소'(eraser enzyme)였다. 암세포가 이 효소의 활성화를 막으면 전이가 촉발됐다.
'지우개 효소'의 결핍은 암세포의 미토콘드리아 활성화를 자극했고, 이렇게 늘어난 에너지가 새로운 암의 씨앗이 온몸에 뿌려지는 원동력이 됐다. 이 경로를 차단하는 치료적 접근은 췌장암뿐 아니라 다른 유형 암 전이를 막는 데도 효과가 있을 거로 과학자들은 기대된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약칭 UC Berkeley)의 크리스토퍼 창 분자 세포 생물학 교수팀이 수행한 이 연구 결과는 24일(현지 시간) 저널 '분자 세포'(Molecular Cell)에 논문으로 실렸다. 이 연구엔 컬럼비아대 통합 암센터 과학자들도 참여했다.
단백질 합성에 관여하는 아미노산은 모두 20종이 있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이 무작위로 연결된 사슬 구조를 가졌다. 단백질이 정상 기능을 하려면 이 사슬이 올바른 형태로 접혀야 한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중 어느 하나라도 화학적 변화가 생기면 단백질이 접히는 형태와 기능에 영향을 미친다. 아미노산 산화 손상(oxidative damage)은 산소 원자 한 개가 추가되면서 발생한다.
보통 '지우개 효소'는 특정 아미노산의 환원에만 관여한다. 단백질 생합성에 필요한 알파 아미노산 중 하나인 메티오닌(methionine)이다. 메티오닌 산화가 암세포 이동을 촉진하는 단백질 기능을 직접 활성화한다는 건 처음 밝혀졌다.
다른 암도 유사 경로 존재 가능성, 새로운 항암 표적 부상
UC 버클리 연구팀은 메티오닌이 산화된 PKM2(피루브산 키네이스 M2) 단백질에 초점을 맞췄다. 놀랍게도 이 단백질을 구성하는 수많은 메티오닌 분자 가운데 단 하나가 산화된 것이 췌장암 세포 전이를 부추겼다.
메티오닌 분자 한 개만 산화해도 해당 PKM2는 마치 4양체(tetramer; 동일 고분자 단량체 4개로 구성된 중합체)를 형성하듯이 다른 세 개의 PKM2와 결합했다.
이런 식으로 PKM2 단백질 4개가 결합하면 암세포의 미토콘드리아가 높은 수준으로 활성화해 전이에 필요한 에너지가 충분히 조달됐다.
암세포 단백질의 메티오닌 분자 하나에 단지 산소 원자 하나가 추가된 것뿐인데 췌장암 전이의 방아쇠를 당기는 위험한 결과를 초래했다.
정상 세포에선 메티오닌이 산화돼 황산화물(methionine sulfoxide)이 생겨도 '지우개 효소'가 산소 원자를 제거해 원래 상태로 되돌린다. 그런데 췌장암 세포에선 이 '메티오닌 황산화물 환원 효소'(MSRA)가 잘 활성화되지 않았다.
그 결과, 메티오닌 산화로 PKM2 4양체가 형성되고, 암세포의 미토콘드리아 활성도가 높아지면서 산화성 인산화(oxidative phosphorylation)가 촉진됐다. 결국 암세포는 메티오닌 환원 프로그램을 스스로 바꿔 계속 성장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했다.
췌장암 세포 이런 '산화-황원 스위치'는 다른 유형의 암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과학자들은 말한다.
예컨대 메티오닌 외에 시스테인(cysteine) 아미노산도 황(sulfur)을 함유해 쉽게 산소와 결합하는 성질을 가졌다. 당연히 인체 내엔 이들 두 아미노산과 결합한 산소를 제거하는 환원 효소가 있다. 하지만 노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환원 효소가 고장 나는 일이 흔하다.
논문의 공동 교신저자를 맡은 컬럼비아대의 크리스틴 치오. 조교수는 "메티오닌 산화를 환원하는 MSRA 효소가, 전이암의 파종을 막는 종양 억제 단백질이라는 게 새로이 확인됐다"라면서 "췌장암은 물론 잠정적으로 다른 유형의 암이 전이암으로 번지는 걸 억제하는 '환원 기반' 표적 치료의 토대가 구축된 것"이라고 말했다.
cheo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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