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의료계와 한의계의 소모적 갈등이 쟁점을 옮겨가며 이어지고 있다.
애초 의료계와 한의계는 중복된 의료 영역 탓에 다양한 쟁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
렇다고 해도 최근 양상은 그간의 것과는 조금 다르다. 정도가 상식 수준을 넘어서면서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내가 살아난다는 막가파 양상이다. 단어는 물론 발언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서슬 퍼런 칼을 꺼내 상대를 난도질하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기기 사용권
최근 갈등의 표면적 시작 점은 대한한의사협회가 9월 8일 사원총회에서 결의한 ‘2013 한의사 선언문’에 대한 대한의사협회의 성명이다.
한의협은 이날 선언문을 통해 ‘한의약 단독법 제정’, ‘독립한의약청 신설’, ‘현대의료기기의 자유로운 사용 보장’을 공식적으로 정부에 요구했다.
의협은 며칠 뒤 상임이사회를 열고 현대의료기기의 자유로운 활용을 요구한 한의계에 대해 “한의사를 의료인에서 배제시켜야 한다”며 강경한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의협은 “전통의학 면허자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은 국민의 인체를 실험대상으로 여기겠다는 망언이다. 한의협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더 이상 인내하거나 방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비난했다.
용어 전쟁
의협의 한의사 의료인 배제 주장으로 의료계와 한의계 간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 정점을 찍은 것은 9월 13일 한의협 소속 한의사 회원 385명의 대학병원 수련의 김 모씨 고소 사건이다.
한의사들은 SNS에 ‘내가 한의사 XX들을 경멸하는 이유’ 등의 글을 올리며 한의사와 한의약을 폄훼한 혐의로 대학병원 수련의 김 모씨를 경찰에 고소했다. 이는 한의협이 명예훼손 혐의 고소를 협회 이름으로 진행한 첫 번째 사례다.
의료계는 용어 전쟁의 서막을 열며 반격에 나섰다. 자신을 의사로 지칭하거나 양의사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한의사들을 찾아 형사고발을 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같은 달 25일 전국의사총연합(전의총)은 성명서를 통해 “자신을 의사라고 광고나 홍보하는 것은 명백한 의료법 위반”이라며 “이를 철저히 조사해 적발된 한의사들을 개별적으로 모두 형사 고발하겠다”고 밝혔다.
또 전의총은 “한의사들이 의사를 양의사라고 폄하하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며 “양방의사, 양의학이란 용어는 의료법에도 존재하지 않는 날조된 용어다. 비상식적인 용어 사용을 금지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질세라 젊은 한의사들로 구성된 참의료실천연대 역시 바로 다음 날 성명을 통해 “대한민국 보건의료 바로세우기는 양의사의 개명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며 되받아쳤다.
또 이들은 “의사를 '왜방사(倭方師)'라고 부르자”고 제안하며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인해 한의사의 권리가 침탈됐고 그 자리를 양의사가 자리 잡았기에 명칭을 왜방사로 변경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의료일원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다음 바톤을 이어받은 것은 노환규 대한의사협회장이다. 그는 30일 국회 보건·환경포럼토론회가 개최한 의료일원화 토론회에서 한방의 과학적 근거가 미약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의료일원화는 꼭 이뤄져야 할 과업이지만 과학적인 검증이 필수적이다. 음양오행설에 기댄 한의학으로는 현대의학과 일치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노 회장은 모 한의사의 말기암 치료제 '00단'을 소개하며 “의사는 최선을 다해 환자를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잘못된 진료를 피하도록 하는 것도 의무다”며 일부 질환에 대한 한방적 접근의 위험성을 강조했다.
과학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말은 한의사들이 크게 발끈하는 대목 중 하나다.
한의협은 2일 성명을 통해 “한의학 진료의 우수성과 탁월함은 SCI급 세계 유수의 각종 학술논문과 연구결과가 입증하고 있다. 일본, 중국, 미국의 존스 홉킨스, MD앤더슨 암센터, 하버드 대학병원 등 30여개 대학병원에서 한의학적 치료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고 밝히며 노 회장의 주장에 크게 반발했다.
아울러 노 회장이 예로 든 말기암 환자 치료사례를 비웃듯 “한의사들의 한의학적 진단과 치료는 우리 스스로가 알아서 할 일이며, 노환규 의협회장은 리베이트 비리와 각종 의료사고 등으로 국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는 일부 양의사 회원들 관리에나 신경써야 할 것”이라며 의협의 치부를 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