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3] 우리나라 최상급 의료기관인 상급종합병원을 ‘중증·응급·희귀질환’ 중심 치료기관으로 재편하는 구조전환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중고’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다.
상급종합병원이 본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취지에는 공감하나 경증 진료 축소와 일반 병상 감소가 수익 악화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47곳 중 44곳 참여…중환자실부터 소아·분만·응급 등 강화
정부는 지난 9월부터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을 추진 중이다.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목표는 상급종합병원이 중증·응급·희귀질환 중심으로 진료하는 ‘중환자 중심 병원’으로서 기능을 확립하는 것이다.
또 상급종합병원과 일반 병·의원 간 불필요한 경쟁을 줄여 의료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전공의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던 관행을 개선, ‘임상 경험과 수련 교육’을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사업에는 현재 국내 상급종합병원 47곳 중 42곳(90%, 11월 19일 기준)이 참여 입장을 밝혔다.
중증진료체계 강화 시범사업을 수행하면서 기회를 잃은 삼성서울병원, 울산대병원, 인하대병원 등 3곳을 제외한 모든 병원이 참여했다.
참여 의료기관은 중환자실, 특수병상, 소아·응급·고위험 분만 등 유지·강화가 필요한 병상을 제외한 일반 병상을 5~15% 감축해야 한다. 반면 중증진료 비중은 50%에서 70% 이상까지 늘린다.
특히 전공의 비중을 현원 기준으로 현행 40%에서 20%로 절반을 줄여야 한다.
또한 소위 빅5 의료기관 중에서는 서울아산병원 336병상, 세브란스병원이 290병상, 서울대병원 187병상, 서울성모병원 111병상 등 총 3186개 병상이 사라질 전망이다. 감축 병상 수를 단순 계산했을 때 서울에서 빅5 병원 2곳이 사라지는 셈이다.
정부는 상급종합병원이 중증·응급·희귀질환 중심으로 개편되면 복잡하게 얽혀있던 의료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정경실 보건복지부 의료개혁추진단장은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은 종합병원, 지역 병의원에 이르는 바람직한 전달체계 확립에 중요한 첫 걸음”이라며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이 순조롭게 진행돼 의료전달체계 정상화로 이어지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상급종합병원 구조를 바꾸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진료 규모가 축소되고, 신규 외래 환자도 감소하면서 경영 악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수도권 A대학병원 교수는 “정책 취지는 공감하지만 이 구조를 만들기에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다. 특히 이미 의료수익이 적자인 상황인데 병상까지 줄이면 상황이 더 악화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어 “아직 경험하기 전이기에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체계에 적응해 나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상급종병 구조전환 시범사업 3년간 총 10조원 투입
정부는 상급종합병원들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매년 3조3000억원씩 3년간 총 10조원을 투자할 방침이다.
구체적으로 중환자실 수가를 현행 수가 50% 수준인 일당 30만원, 2인실에서 4인실까지 입원료를 현행 수가 50% 수준인 일당 7만5000원을 가산해 총 6700억 원을 지원키로 했다.
또 저평가된 중증수술 수가 인상을 위해 상급종합병원에서 주로 이뤄지는 910개 수술 수가와 이 같은 수술에 수반되는 마취료를 50% 수준으로 인상, 총 3500억원을 지원할 예정이다.
특히 정부는 연간 지원 규모 중 30%에 해당하는 금액은 성과 평가를 거쳐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현행 행위별 수가 한계에서 벗어나 성과를 달성했을 경우 더 많은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단 의미다.
정경실 의료개혁추진단장 “800여 개를 시작으로 2027년까지 약 3000개의 저보상된 수가를 적정 수준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두경부암, 소화기암 등 중증 암 수술과 심장 수술, 뇌혈관 수술 등 난도가 높은 수술, 응급수술 비율이 높고 수술 후에 중환자실 입원 비율이 높은 수술 등이 대상”이라고 덧붙였다.
병원들, 수익 악화 우려…입원료 인상 등 시뮬레이션 가동
정부 지원과 별도로 병원들은 수익 악화를 우려해 자구책 마련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수도권 C대학병원 관계자는 “구조전환에 따른 수익 악화에 대비해 입원료 인상 등 여러 시뮬리에션을 돌리면서 여러 대책을 세우고 있다. 여기에 정부 지원이 뒷받쳐질 경우 큰 문제는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연세의료원은 이미 단순 진료만으로는 유지가 어렵다면서 수익구조 다각화 계획을 마련, 공개한 상태다.
금기창 연세의료원장은 지난 11월 취임 후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병원 모든 기능을 초고난도 질환 치료 기반으로 전환하고, 초고난도 중증질환자가 세브란스병원에서 진료를 못 받는 상황이 없도록 시스템도 전면 개편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특히 금 의료원장은 “의료원 산하 각 병원이 중증질환 중심으로 인프라를 전환하고 있다”며 “앞으로 진료수익만으로는 미래의료를 준비하기 힘들다. 진료 외에도 다양한 수익구조를 만들어 성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른 한 상급종합병원 관계자는 “병원 자체적으로 입원료 인상 등 내부 시뮬레이션을 돌리고 있다. 여기에 정부 지원이 뒷받침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의료환경 대대적인 변화가 예고되면서 당분간 변화보다 안정 기조를 택하는 모습도 포착된다.
서울아산병원은 최근 박성욱 아산의료원장과 박승일 서울아산병원장 3연임을 결정했다. 이번 인사는 의정갈등 장기화와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등 급변하는 병원계 패러다임이 속에 안정적 변화를 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한양대병원은 병원장이 전문의들에게 매출을 최대한 올릴 수 있도록 환자들을 중환자실에 우선 입원하게 하거나, 단가가 높은 복강경 수술이나 로봇수술을 권장하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 보내기도 했다.
이형중 병원장은 해당 메시지에서 “정부 밀어붙이기식 의료개혁 와중에 한양대병원이 10월 29일 자로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시범사업에 선정됐다”며 “병원에서 거둘 수 있는 최대한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구조조정’ 신호탄?…의사·간호사 ‘고용 불안’ 우려도
일각에서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이 병원 근로자들 노동환경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이대목동병원은 612병상에서 58병상을 감축해 한 개 병동이 폐쇄됐고, 이 과정에서 간호사·간호조무사 등은 갑작스러운 부서 이동을 겪어야 했다.
세브란스병원도 강남과 신촌 두 곳에서 구조전환 시범사업이 진행 중인데 약 370병상이 축소돼 간호사 배치 조정을 논의 중이다.
간호사뿐 아니라 의대 교수들도 구조전환 영향권에 놓여있다.
실제 중증도가 낮은 가정의학과, 정형외과, 재활의학과 등 일부 진료과는 상급종합병원에서 입지가 지금보다 좁아질 수 있다.
이들 진료과는 비만부터 검진, 통증, 미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지만, 정부가 중점적으로 밀고 있는 중증·응급·희귀질환 분야와는 거리가 있다.
실제 대한두통학회는 상급종합병원 구조전환 사업에서 중증 두통 환자가 소외될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하며 환자들의 병원 접근성이 낮아지면 안 된다는 입장을 내기도 했다.
주민경 회장은 “두통환자가 전부 경증은 아니다. 이들이 병원에서 적절한 대우를 못 받을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는 바가 있다”며 “난치성 두통이나 놓칠 수 있는 2차 두통환자들의 중증 병원 접근성에 해가 돼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기존에 중증으로 분류되는 478개 전문진료 질병군에 속하지 않더라도 고난도 수술·시술 필요성과 환자 상태 등에 따라 중증으로 인정될 수 있도록 분류 체계를 개편할 예정이다.
현재 당뇨병은 중증으로 분류되지 않고 있지만, 중증도 분류 체계에 환자 연령과 복합 질환 등이 반영되면 전문진료 질병군으로 재분류하는 식이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송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삼성서울병원, 울산대병원, 인하대병원이 최종 확정되기 전에 출고된 기사임을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