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고원중 교수(前 삼성서울병원 호흡기내과)는 국내는 물론 해외 학계에서도 널리 인정받는 폐질환 분야 권위자였다.
지난 2019년 고 교수의 안타까운 소식이 알려졌을 때 의료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동료 의사들은 “우리나라 의료계의 소중한 인재를 잃었다”며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고 교수가 세상을 떠나고 3년이 지났다. 남겨진 그의 가족들은 아직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유족은 최근 사학연금공단을 대상으로 ‘직무상 유족보상금’을 청구했다. 하지만 공단은 이를 기각했다. 고 교수가 당시 놓인 상황과 극단적 선택 간의 직접적인 연관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이었다.
유족은 "고 교수가 당시 만성적인 과로에 시달리던 상태"라고 밝혔다. 이런 가운데 직장 내 스트레스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우울증상을 겪게 됐고, 결국 극단적 선택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유족 측이 제공한 직업환경의학과 의학감정서에는 당시 고 교수 상황이 자세히 담겨있다.
“주 80시간 넘어 100시간에 도전하고 있다”…심각했던 업무 과중
고인의 의학감정서를 작성한 서울 소재 某상급종합병원 직업환경의학과 A 교수는 대학병원 교수의 노동환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A 교수는 먼저 "대학병원 의사의 정확한 노동시간을 확인하기는 쉽지 않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표는 외래 진료, 입원환자 수 등이지만 그 외 학생, 전공의 교육, 연구를 위해 쓰는 시간 등은 파악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고인이 생전 일궈낸 연구 업적, 주변 동료들의 진술, 자신이 직접 작성한 이메일 등의 자료는 그의 노동시간을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며 "이러한 자료는 고인이 극단적인 장시간 노동을 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고 말을 이었다.
감정서에 따르면 고 교수는 지인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1주일에 80시간 이상 일해도 나는 시간이 모자라요', '80시간을 넘어 주 100시간에 도전하고 있어요'라고 토로했다.
주 40시간의 2배에 달하고, 근로기준법이 정한 1주당 최대 근로시간인 52시간을 60% 이상 넘긴 상황이 일상적이었던 것이다.
A 교수는 "대학병원 의사들의 경우 진료업무와 연관된 다양한 행정업무 및 필수적으로 따르는 전공의 교육과 학생교육, 진료와 연관해서 수행하는 다양한 임상연구 등이 있다"며 "고인 연구업적, 공동연구 수행의 양, 업무량에 비해 적은 인력 등을 고려하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업무량이 있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일반적으로 전문직(대학병원 의사)이 자기 노동시간과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는 시간은 스트레스로 인해 노동 강도가 높고, 자율성은 비교적 낮고, 회피 또한 불가능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 밖에도 대학병원 교수는 연구실적 압박, 후임자 채용 등의 업무가 있고 무엇보다 해당 분야의 지속성을 위한 끊임없는 연구는 필수로, 야간과 주말을 이용해 연구하지 않으면 인정은 물론 인력·장비·공간 등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부연했다.
"건강상태 및 직장 내 관계 갈등 인한 스트레스가 우울증으로 이어져"
A 교수는 당시 고 교수가 놓였던 상황에도 주목했다.
A 교수는 "직장 내 관계 갈등은 스트레스 요인 중 상당히 중요한 요인이며, 직무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서 우울증 발생이 증가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라고 말했다.
과중한 업무 외에도 병원 내 직위에 따른 여러가지 문제 상황이 고 교수에게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충분히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감정서에 따르면 고 교수가 일하던 호흡기내과는 병영경영 측면에서 수익성이 좋은 분야가 아니었다.
이로 인해 언제나 인적 지원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심지어 다른 분야 일을 병행해야 하는 상황이 잦았다.
여기에 고 교수는 개인적인 건강 상태까지 양호하지 못한 상태였다. 과중한 업무로 인해 만성적인 요통과 추간판탈출증까지 겪어 지속적으로 진통제를 복용하고 있었다.
A 교수는 "그럼에도 고인은 이러한 질환을 적극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시간을 내지 못할 정도로 과로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장기간에 걸친 과로와 신체적 고통, 회사내 관계갈등, 병원(조직)의 지원 부족 등이 상호작용해 고인에게 우울증이 발생했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관리되지 않은 우울증 상태에 있던 고인에게 자해행위로 이어졌다고 판단한다"며 감정서를 마무리했다.
현재 유족 측은 사학연금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직업환경의학과 의학감정서 외에도 심리부검서와 주변인들 증언 등을 종합했을 때 이는 ‘직무상 재해’로 인정돼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한편, 지난 2019년 고 교수가 세상을 떠난 이후 열린 추모식에서 권오정 삼성서울병원 前 원장은 그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후 병원은 그를 기리기 위한 ‘고원중 연구기금’을 신설했다. 폐질환 분야에서 성과를 거둔 의사에게 수여되는 이 기금은 2019년 이후 매년 수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