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일리메디 박대진 기자] 그야말로 적재(適材), 적소(適所), 적시(適時)였다. 폭증하는 확진자 대비 턱없이 부족한 병상으로 의료체계는 붕괴 직전이었다. 절체절명의 상황. 국립대학교병원들이 움직였다. 이미 수 차례의 병상 동원령에 여력은 없었다. 그렇다고 국가 위기 상황을 목도만 하고 있을 수도 없었다. 맏형 격인 서울대학교병원이 솔선했다. 나머지 국립대병원들도 기꺼이 동참했다. 국립대병원협회 김연수 회장은 “뭉클했다”는 표현으로 당시를 술회했다. 국립대병원들이 동일한 목표, 그것도 국가 공중보건 위기 극복을 위해 제대로 의기투합한 그 상황이 가슴을 뜨겁게 했다. ‘코로나19’라는 사상초유의 감염병 사태에서 발견한 공공병원의 값진 존재감과 잠재력이었다.
병원 중의 병원 → 병원을 위한 병원
사실 그동안 국립대병원들은 지역의 맹주였다. 규모와 시설, 인력이 타의추종을 불허했고, 지역민들 역시 그런 국립대병원을 신뢰했다.
하지만 규모의 경제를 앞세운 민간병원들이 속속 등장했고,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경쟁이 시작됐다. 자연스레 ‘공공’이라는 정체성도 퇴색될 수 밖에 없었다.
김연수 회장은 국립대병원이 민간병원들과 경쟁을 벌여야 하는 작금의 상황을 개탄했다. 국민과 병원계 모두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안타까움도 전했다.
아울러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국립대병원 역할 재정립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병원 중의 병원(Hospital of Hospital)’에서 ‘병원을 위한 병원(Hospital for Hospital)’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요구되는 시점이라는 판단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국립대병원과 분원, 그리고 지방의료원이 긴밀한 공조체계를 이뤄 각 지역의 공공의료와 필수의료를 책임지는 든든한 사회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는 견해다.
김연수 회장은 “앞으로 국립대병원들은 진료 영역에서 민간병원과의 경쟁을 벌이는 구조가 아닌 지역 의료시스템 확립에 선제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환자들이 더 나은 병원, 더 나은 의사를 찾아 떠날 필요가 없는 이른바 ‘지역완결형 의료’가 궁극적인 지향점이고, 국립대병원들이 그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구상이다.
그는 “수도권 병원을 찾는 지방환자 95%는 해당 지역에서도 치료가 가능한 경우”라며 “지역완결형 의료체계가 절실한 이유”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그러한 국립대병원의 역할을 체감하고 방증시킨 좋은 계기였다.
권역책임의료기관으로서 감염병 사태 초기 생활치료센터를 가동하고 확진자 치료와 방역 관련 프로토콜을 개발 공유하는 등 선제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병상대란 당시에는 자발적으로 중증병상을 내놓으며 국가 위기 상황 극복에 일조했다. 중환자 병상만 놓고 보면 전체 15%에 불과한 국립대병원들이 코로나19 중증환자 40%를 담당했다.
김연수 회장은 “코로나19는 적잖은 시련이기도 했지만 역으로 국립대병원들의 정체성과 역할, 향후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설정할 수 있었던 좋은 계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국립대병원, 분원, 지방의료원이 수직적 구조가 아닌 유기적 관계를 형성해 공공의료와 필수의료 체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지방의료의 질적 성장을 도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의료전달체계 아닌 의료협력체계
김연수 회장이 구상하는 의료체계는 새정부 지향점과도 맥(脈)을 같이 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일성으로 ‘필수의료 강화’를 천명했고, 권역책임의료기관인 국립대병원 중심의 공공의료 확립 의지를 확고히 했다.
김연수 회장은 “새정부의 의료정책 방향성에 전적으로 공감한다”며 “국립대병원 중심의 지역완결형 의료체계 구축은 국립대병원협회도 지향해온 방향”이라고 말했다.
공공의료를 수행할 인프라 부족을 탓하기 보다 국립대병원을 주축으로 지방의료원의 시스템과 진료 수준을 상향평준화 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그 전제조건으로 의료인력을 꼽았다. 지방의료원을 비롯한 공공병원들이 국민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이유는 좋은 의료인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라는 판단이다.
그는 “국립중앙의료원과 국립암센터도 전문인력 확보 문제로 고군분투하고 있다”며 “우수 의료인력의 지속성을 확보하지 못해 궁극적으로 진료에 대한 신뢰 저하로 이어진 결과”라고 말했다.
이어 “결코 이들 병원의 폄훼는 아니다. 결국은 구조적 문제다. 교수급 인력은 전공의와 간호사 등 진료, 연구 지원인력을 필요로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구조”라고 덧붙였다.
김연수 회장이 그동안 ‘공공임상교수제’ 도입에 가장 공을 들인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수인력이 절실한 공공의료 현장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천착 끝에 고안해 낸 대책이었다.
‘공공임상교수’는 국립대병원 소속 의사로서 코로나19와 같은 재난대응과 진료, 교육, 연구 부문의 공공성 강화사업을 전담하는 정년트랙 의사인력이다.
김연수 회장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덕에 최근 총 150명의 공공임상교수 선발이 확정됐다. 예산으로는 총 94억원이 배정됐다.
어렵사리 이뤄낸 ‘공공임상교수제’의 궁극적 지향점은 의료협력체계 구축이다. 국내 의료정책을 논(論) 함에 단골로 등장하는 의료전달체계와는 완연하게 다른 개념이다.
그는 “의료전달체계는 표면적으로 이상적 개념으로 보이지만 상당히 분절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며 “각 단계의 의료기관 역할이 단절되는 구조”라고 말했다.
이어 “진정 환자를 위한 구조는 다음 단계로 넘기는 개념이 아닌 각 의료기관의 유기적 협력에 기반한 의료”라며 “공공임상교수제는 의료협력체계의 중요한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재정 기전 차별화, 역할 기전 차별화
서울대병원이 한 해 지출하는 의료비용은 1조3000억원에 달한다. 이 중 정부지원금은 1%도 안된다. 국립이지만 사립과 동일한 ‘독자생존’ 구조다.
그럼에도 ‘국립’이기에 기대하고 요구하는 역할은 곱절 이상이다. ‘공공성’과 ‘수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처지다.
김연수 회장은 “국립대병원의 재정 기전 차별화를 통한 역할 기전 차별화가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적어도 운영자금의 10~20%는 지원이 이뤄져야 정부가 국립대병원들에게 기대하는 공공의료의 원활한 수행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모름지기 공공의료는 공적 자원이 투입되는 영역”이라며 “민간병원과 동일한 재정기전을 갖고 있는 구조에서 역할기전을 달리하길 바라는 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립대병원들의 역할 재정립을 위해 풀어야 또 다른 과제로는 산학협력단 문제를 지목했다.
수 천명에 달하는 국립대학교병원 소속 연구원들이 ‘무적자(無籍者)’ 신분으로 사회적 역차별을 당하고 있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정부가 헬스케어산업을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지목하고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정작 그 산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연구인력의 열악한 처우는 외면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행법상 국립대병원은 대학이 아닌 병원 자체적인 산학협력단 설립이 불가능하다.
연구 책임 교수가 학교 소속인 경우 해당 연구원은 산학협력단 인력으로 편제될 수 있지만, 교수가 병원 소속이라면 연구원은 무적자가 될 수 밖에 없다.
최근 학교 소속이 아닌 병원 소속 교수 비중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무적자 신분의 연구원도 늘고 있는 셈이다.
김연수 회장은 “국립대병원의 핵심 기능 중 하나인 연구 부분에 상당한 제약을 받고 있다”며 “의료 발전을 위한 연구 활성화를 위해서도 병원 산학협력단 설치가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연구체계 정상화를 위한 병원 산학협력단 설치는 국립대병원의 숙원”이라며 “현재 국회에서 논의가 되고 있는 만큼 최종 입법으로 이어지길 고대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