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외면과 낮은 수가 때문에 국내에 어린이재활전문병원이 전무하다. 장애어린이는 제 때 정확한 재활치료를 받으면 자립할 수 있다. 체계적인 재활치료를 제공하고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오는 4월 국내 최초의 통합형 어린이재활병원인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 문을 연다.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은 비영리재단인 푸르메재단이 100% 기금으로 건립, 운영하는 병원이다. 시민, 기업,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어린이 재활과 자립을 돕기 위해 함께 힘을 보탠 국내 첫 사례다.
병원 건축 및 초기 운영예산 440억원 중 420억원이 1만여명의 시민과 500여개 기업 및 단체의 자발적 기부금으로 마련됐다.
최대 기부자인 넥슨컴퍼니가 모금액의 절반인 200억원을 기부했다. 서울시는 건축비 일부와 의료장비를 지원했고, 마포구는 상암동에 병원 부지를 제공했다. ‘기적의 재활병원’으로 불리는 이유다.
이 기적의 씨앗을 뿌린 주인공은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이사[사진]다. 데일리메디는 최근 백 상임이사를 만나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의 탄생 과정과 국내 어린이재활치료 현실에 대해 들었다.
아내 교통사고로 재활치료 현실에 눈 뜬 전직 기자
백 상임이사는 장애인 재활치료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CBS와 한겨레신문, 동아일보에서 근무한 전직 기자다. 독일 뮌헨대 정치학연구소에서 통일문제를 연구했고 귀국하기 전(前) 가족여행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사고로 그의 부인은 다리를 잃었다.
장애인이 된 부인의 재활치료를 도우면서 그는 재활병원 건립을 결심하게 됐다. 한국의 열악한 재활치료 환경을 피부로 절감했기 때문이다.
백 상임이사는 “공급이 부족해 입원하려면 평균 3~4달 이상을 기다리는 것이 기본이고 장기입원 자체가 어려워 여러 병원을 떠돌아야했다”며 “아내를 보면서 환자 중심의 지속적인 재활치료를 제공하는 병원을 만들자는 꿈을 꾸게 됐다”고 전했다.
어린이재활치료병원은 국내에 전무하다. 성인 재활치료병원도 부족하지만 국내에 5개가 있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에는 202곳, 독일 140곳, 미국 40곳의 어린이재활치료병원이 있다. 국내 의료기관 중에서 보바스어린이의원이 민간기관 중 유일하게 어린이재활전문병원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적자 누적으로 한계에 직면했다.
병원 건립을 위한 비영리재단을 설립 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백 상임이사는 2002년 수제 독일 하우스맥주 체인점 옥토버훼스트를 창업했다. 3년 후 옥토버훼스트의 지분 10%에 교통사고 가해자와 8년간의 소송 끝에 받아 낸 피해보상금 20억원의 절반을 보태 2005년 재단을 세웠다.
그리고 11년 동안 준비한 끝에 어린이재활병원 건립의 꿈을 이루게 됐다.
병원은 지상 7층, 지하 3층에 입원 병상 91개, 낮 병상 40개 규모다. 재활의학과·소아청소년과·정신건강의학과·치과 등 4개 진료과와 재활치료센터(물리, 작업, 언어치료 등)를 갖추고 있다. 하루 500명, 연 15만명의 장애어린이와 지역주민을 치료할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다. 한달여 시범 운영을 거쳐 4월 말 공식 개원한다.
수영장·문화센터·직업재활센터·어린이도서관·열린예술치료실·다목적홀 등 다양한 복지시설을 갖춰 장애어린이뿐만 아니라 비장애어린이와 지역주민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했다.
재단은 개원을 앞두고 80여명의 의료진과 직원 채용도 완료했다. 국내 재활의학과 1세대인 이일영 前 아주대의대 교수가 병원을 이끈다.
경인의료재활센터병원장을 지낸 임윤명 교수, 푸르메재활센터 송우현 전문의(재활의학과), 하지혜 전문의(정신건강의학과) 등 의사 6명, 간호사 10명, 재활치료사 40명이 전문 재활치료를 제공한다.
백 이사는 “국내 장애 어린이 중 90% 가량이 사고나 질병 등 후천적 요인에 의한 것이다. 장애 증상을 일찍 발견하고 치료하면 성인이 돼서도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지만 국내에는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며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이 조기 치료와 자립을 위한 교육까지 아우르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 차원에서 장애어린이 재활치료 공백 메워야”
닻은 무사히 올랐지만 앞으로의 문제는 안정적인 운영이다. 자체 시뮬레이션 결과 매년 30억원~37억원의 적자가 날 것이라는 예상이 나왔다.
다행히 지역사회 공공의료시설이면서 서울시 공공의료 안전망 병원으로 지정돼 매년 8억원의 운영비는 지원받는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문을 두드리고는 있지만 예정된 지원 사항은 현재로서는 없다.
나머지 적자는 재단 모금 사업을 통해 충당해야 한다. 하지만 장애인 문제는 내 가족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는 인식 때문에 모금이 쉽지만은 않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병원 건립 및 초기 운영비로 목표한 모금액도 아직 20억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백 이사는 “민간 의료기관은 적자 누적으로 어린이재활병원을 설립, 운영하기가 어려운 게 한국의 현실”이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 모금으로 의료 공백을 해소할 병원이 건립됐다면 지속적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치료 수가를 인상하거나 운영비 일부 지원하는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하다. 제도적인 뒷받침 없이 어린이재활병원이 자생하기 어렵다”면서 “장애인이 행복하고 편안하면 모두가 다 편안할 수 있다. 장애를 각 가정이 떠안아야 할 고통으로 돌리지 말고 국가가 나서 책임져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