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대한민국 보훈의료, 2023년 쇄신 가능할까
전문의 이탈 심화·의료 질 저하…"지역책임의료기관 지정·의료원 체계 구축" 대안
2022.12.22 12:07 댓글쓰기

앞서 수년 간 불거진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의 임원 비리에 이어 올해도 보훈병원은 시끄러웠다. 올해 전국 6개 보훈병원에서 전문의 사직이 잇따랐고 중앙보훈병원에서는 의사들이 민주노총에 가입, 본격 집단행동을 시작했다. 안 그래도 정원 대비 부족한 의사 인력이 자꾸 이탈하다 보니 보훈병원의 지나치게 긴 진료·검사 대기 시간 등 의료서비스 질이 저하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장기적으로는 보훈병원의 주 진료대상인 국가유공자는 점점 줄고 있어 혁신 없이는 인프라가 모두 사장될 위기에 처했다. 중앙보훈병원은 ‘지역 책임의료기관 지정’이라는 나름의 돌파구를 찾는 가운데, ‘보훈의료원’ 체계 구축 등 보훈의료 쇄신을 위한 의견이 안팎으로 쏟아지고 있다. 데일리메디가 올 한해 보훈병원에 닥친 위기와 나아갈 길을 정리해봤다. 


우리나라 보훈의료체계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라 현재 국가보훈처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보훈복지의료공단이 주관하는 ▲의료사업 6개 보훈병원, 1개 보훈요양병원 ▲복지사업 7개 보훈요양원 등으로 구성돼 있다. 


그런데 수년 전 부터 보훈공단 임원 파벌 갈등 등 내부 문제가 지속적으로 공론화되고, 급기야 비리 문제까지 터졌다.


지난해 말 부하 직원에게 압력을 가해 부산·서울 보훈병원 평가를 뒤바꾼 前 보훈공단 이사장이 유죄를 인정받아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공단 내부 문제로 시끄러웠던 것도 잠시, 특히 전국 보훈병원에서 의사 인력 이탈로 보훈의료체계가 흔들리고 있다는 위기감이 만연해 있다. 


전국 6개 보훈병원, 1개 보훈요양병원에서 총 3428병상을 운영 중이지만 전문의는 수년 간 정원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금년 들어 전문의 줄사직이 이어지며 상황이 악화됐다. 


올해 초에만 광주보훈병원에서 전문의 12명, 중앙보훈병원은 11명이 떠났거나 사직 의사를 밝혔다. 부산보훈병원에서는 안과 전문의 전원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금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강병원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보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보훈병원의사 정원 미달은 전국적으로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부산보훈병원 보건직 3명, 광주보훈병원 의사 14명·간호사 2명·보건직 5명, 대구·대전보훈병원은 각각 의사 1명, 인천보훈병원 의사 5명·간호사 16명 등 총 64명의 인력이 추가적으로 필요했다.


특히 부산·대전·인천보훈병원 등에서는 감염내과 의사가 전무했다. 병원은 대체인력 등 투입에 나섰지만 아직까지 정원 채우기가 요원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보훈병원의 경우 금년 11월 말 기준 총 19명이 병원을 떠났고, 20명을 충원했지만 여전히 22명이 부족하다. 


“의사 이탈 심각”…보훈병원 의사노조 폭발


보훈병원에서 의사 인력이 계속 떠나는 것은 지난 2001년부터 병원 경영을 맡아 온 공단 측과 병원의 갈등,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비롯됐다는 문제의식이 불거지며 의사들은 집단행동을 본격화했다. 


지난 2018년 결성, 100여명으로 구성된 보훈병원 의사노조는 의사 직종 최초로 금년 3월 민주노총 산하로 들어가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동안 노조 활동에 있어 국내 첫 의사노조인 동남권원자력병원 의사노조 도움을 받아왔지만 더 이상 독립 노조로 활동하는 데 한계를 느껴 상급단체를 두게 됐다. 


보훈병원 의사노조 초대 위원장에서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보훈병원 의사노조 분회장이 된 주인숙 중앙보훈병원 산부인과 과장은 “병원장 권한인 인사권 및 재정권을 모두 공단이 행사한다”고 폭로했다.


이어 의사 이탈 이유에 대해 “보훈병원 의사들은 비슷한 규모의 타 병원 대비 임금이 적고 정년 또한 60세로 짧다”며 “신규 전문의 뿐 아니라 장기근속 전문의도 대학병원·개원가로 빠져나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의사 이탈은 결국 보훈의료 서비스 질 저하로 이어졌다. 


일부 진료과목에 전문의가 아예 없어 환자들이 발걸음을 돌리고, 급기야 초음파 검사는 대기 기간이 무려 1년이 넘는 상황이 초래된 것이다. 


문제가 심각하자 국가보훈처도 칼을 빼들었다. 


보훈처는 올해 7월 보훈병원에 예약·진료·입퇴원 등 전 영역 진료시스템 점검, 보수체계 개편, 보훈공단·보훈병원 간 협업체계 구축 등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보훈처는 “고비용 저효율 사업구조 등에 발목이 잡혀 공공기관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보훈의료 혁신위원회’를 보훈처 정책자문위원회 내 분과위원회로 설치했다. 


보훈공단도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중앙보훈병원 관계자는 “전문의 임금 등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단 차원에서 ‘의사 처우개선 용역’을 발주해 개선방안을 만들고 있다”고 전했다. 


“수십년 뒤 보훈병원 치료 인프라 등 사장” 


의사 부족이 보훈병원이 처한 시급한 문제라면, 수십년 후 고령의 국가유공자들을 치료하는 인프라가 모두 사장될 수 있다는 장기적인 문제도 있다. 


주인숙 보훈병원 의사노조 분회장은 “산과 등 필수의료 기능을 살려 공공병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앙보훈병원은 국가 사회 기여자, 지역주민 등으로 진료 범위를 넓힌 지역책임의료기관으로 기능하고, 특수목적 공공병원을 위한 별도 기준을 마련해 상급종합병원으로 지정받겠다는 청사진을 그렸다. 


유근영 중앙보훈병원장은 지난 5월 취임 1주년을 맞아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팬데믹 기간 동안 코로나19 환자 4만명을 진료한 우리 병원도 향후 국가재난 시 동남권 진료를 맡고 싶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에 중앙보훈병원은 ▲1차 위탁병원 ▲2차 지방보훈병원·타 특수공공병원 ▲3차 중앙보훈병원 등으로 구성되는 특수공공의료영역 의료전달체계를 갖추기 위해 상급종합병원 지정을 추진한다. 


유근영 병원장은 “현재 일반의료체계 상급종합병원 지정 평가기준을 특수목적병원에 적용하면 고령환자가 많고 신생아 중환자실이 없는 등 해당 병원 특성이 반영되지 않는다”고 계기를 설명했다. 


이에 중앙보훈병원은 국립암센터와 함께 공동전선을 펼치고 있다. 사안에 공감하는 지역구 의원들과도 접촉해 입법 논의를 진행 중이다. 


합리적 해법은 ‘의료원 체계’ 구축


보훈병원들이 보훈의료의 쇄신책을 놓고 고민 중인 가운데, 올 하반기에는 “의료원 체계를 구축하면 된다”는 현실적인 대안이 외부에서 나왔다. 


기존 보훈공단 산하 6개 병원이 있는 행정 중심 구조에서, 의료 부문을 전문적으로 담당할 의료원 체계를 만들어 독립성을 보장한다는 게 아이디어의 골자다. 


올해 10월 열린 ‘제5회 보훈병원 공공보건의료 컨퍼런스’에서 주영수 국립중앙의료원장은 “현재 가장 큰 보훈의료 문제는 보훈의료전달체계가 작동하지 않는 점”이라고 진단했다.


실제 보훈환자는 전국 6개 보훈병원, 6개 보훈요양원, 318개 민간위탁의료기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 중복 검사·투약 등을 예방하기 어렵고 민간기관에서 수익성 위주 진료만 행해져도 통제할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주 원장은 “보훈병원이 모두 종합병원급으로서 1·2·3차 의료 역할을 나눠 수행해 비효율적이다”며 “특히 1차의료를 담당하는 위탁병원마저 대부분 종합병원 위주로 지정돼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보훈공단 조직을 개편해 보훈정책 중 의료부문을 의료인들이 기획하고 평가할 수 있는 독립된 의료원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게 주 원장의 입장이다. 


보훈의료원장을 중앙보훈병원장이 겸직하는 등 의료인이 의료원장을 맡고, 모든 의료지원실과 일부 복지지원실을 의료원장 관할 직속부서로 위치시켜 행정권을 강화하는 방식이다. 


주 원장이 구상한 보훈의료원 체계에서는 의료사업 전국 6개 보훈병원과 복지사업인 8개 보훈요양원, 1개 보훈재활체육센터가 모두 의료원 소속이 된다. 


그는 “중앙보훈병원은 전문 진료기관 역할을 하도록 연구와 수련 기능에 집중해야 한다”며 “의사인력 부족 해결을 위해 인센티브를 주고받을 수 있는 대학과 협약을 다수 체결하는 방법이 가장 현실적”이라고 조언했다. 


유근영 중앙보훈병원장은 미국 보훈의료제도에 빗대어 조직 변화가 보훈의료 쇄신을 유도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쳤다. 


그는 “1900년대 초반까지 미국 보훈의료는 단절되고 긴 진료 대기시간 및 의료기관 접근성 부족,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한 서비스 질, 관료주의 등에 영향을 받았는데 지금 우리와 큰 차이가 없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은 전체적인 관련 조직 변화가 일어나 지금은 전 세계가 부러워할 보훈의료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다”며 “중앙보훈병원이 구심점 역할을 해서 크게 변모된 보훈의료체계를 만든다면 본연의 유공자 진료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위 내용은 데일리메디 오프라인 송년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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