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보호자가 기억 못하는 '필수의료 마취통증의사'
권민아 교수(단국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2025.03.11 06:00 댓글쓰기



최근 드라마 '중증외상센터'가 방영돼 인기를 끌면서 응급의료 현실과 중증외상 분야에 대한 대중들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 흥미를 위해 특정 과나 직역에 따라 시행할 수 있는 의료행위 묘사가 현실과는 좀 다르게 방송, 일각에서는 대중들에게 왜곡된 의료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마취통증의학과 펠로우로 등장하는 캐릭터는 응급상황에서 레지던트 연락을 받고 막말을 하거나, 환자보다 퇴근을 우선시하고, 수술 중 본인 편의를 위해 임의로 승압제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현실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인기드라마 속 왜곡된 묘사 아쉬움···환자 바이탈 정상으로 회복돼 소변 나올 때 보람"


실제로 근래 빅5를 비롯 주요 대학병원에는 마취과 전공의들 집단 사직 후 마취과 교수들마저 퇴사가 증가, 암 수술을 비롯해 심장 등 응급수술이 차질이 빚어지고 수술이 몇달씩 늦어지는 상황이 일반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번 의료대란을 통해 다른 진료과보다 '마취'가 정말 중요한 필수의료라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특히 외과계 교수들은 절대적으로 공감하는 사안이다.


권민아 단국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사진]는 최근 데일리메디와 인터뷰에서 드라마와 실제 수술실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권 교수는 단국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에 20여 년째 재직 중이다.


권민아 교수는 "마취통증의학과는 병원 내 거대한 수술 일정을 초(秒) 단위로 테트리스처럼 각 수술방에 집어넣어 정해진 시간 동안 모두 시행되도록 하는 막중한 스케줄러다"라고 소개했다.


이어 "모든 수술실에는 마취통증의학과 과장과 의국장 교수 감독하에 chief scheduler 마취의(최고 연차 전공의)가 있고, 수술실은 그의 지휘에 따라 운영된다. 각 수술실 담당 마취과의사는 어레인지 받은 수술을 위한 마취를 정해진 시간에 수행한다. 이를 위해 모든 마취통증의학는 1년 365일 24시간 적정한 수술을 수행하기 위해 완벽한 교대 시스템을 운영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드라마처럼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고 불안하거나 연락을 피할 이유가 없다. 시간이 되면 다음 근무자가 정시에 인계받기 때문이다. 또한 수술팀은 환자 입원 당시 본인 환자이면 근무시간이 지나도 수술이 끝날 때까지, 혹은 환자 중증도에 따라 교대하지 않고 근무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중증외상수술, 완벽한 팀플레이 중요…드라마처럼 면전에서 무시하는 상황 거의 없어"


드라마에서는 천재 외과 전문의 백강혁이 다른 의사들을 무시하는 장면이 적잖게 등장한다. 


권 교수는 "중증외상수술은 완벽한 팀플레이를 요한다. 실제로는 각 과 전문성과 경험 가치를 최고로 존중하며 수술과와 마취과, 응급의학과 및 진단방사선과 등 모든 의료인은 면전에서 모욕을 주며 잘못을 지적하거나 무시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며 "이건 전문의 간 불문율이고 간호부와 방사선과, 병리과 등 직역이 달라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상식적 소통"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극 중에서 중증외상팀 지원을 고민하는 마취과 의사로 등장하는 백경원이 수술 중 환자 상태 악화 시 담당 교수에게 노티하지 않고 백강혁 지시를 받는 모습도 등장하는데, 이 역시 현실과 큰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다.


권 교수는 "실제 수술에서는 모든 마취, 특히 중증외상마취는 담당 마취과 교수를 필두로 전공의, 간호사 등의 팀이 움직인다. 고연차 전공의라도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여러 명이 함께 역할을 분담해서 수행한다"며 "마취과장이 응급수술에 가는 백경원에게 '희망고문 하지 말라'고 말리는 것도 실소(失笑)할 설정이다. 어떻게든 도와주려고 하지 방해하는 분위기가 아니"라고 밝혔다.


이 밖에 드라마에서 힘든 수술을 앞둔 마취과 의사가 퇴근 시간만 기다리며 회피하다가 호통을 듣고 뛰어가서는 소극적인 태도로 수술의사 명령대로 우물쭈물 마취하는 모습이 방송되기도 했다.

 

권 교수는 "최근 동료 교수들과 이 장면에 대해 얘기하면서 '드라마 원작자가 이비인후과 의사인데 수련기간 마취과에 당한 게 얼마나 많았길래 이렇게 묘사했을까'라고 웃었던 게 기억이 난다"고 씁쓸해했다.


이어 "중증외상센터에서는 국가적 지원하에 모든 팀원이 준수해야 할 규칙과 운영 방식이 있고 응급실, 수술팀, 마취과 및 중환자실에 이르는 모든 팀이 환자를 살린다는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 외과의사만 환자를 위하고 사명감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관련 부서 의료진들이 한 목적으로 움직인다"고 덧붙였다.


"필수의료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성과 주도성 인정받는 시대가 오길 희망"


이처럼 마취과 의사들은 사명감을 갖고 일한다. 마취통증의학과를 지원하는 의대생과 인턴들은 생사 갈림길에 있는 환자의 바이탈 사인을 구해 올리는 외상마취 짜릿함과 사람을 살리는 보람 때문에 지원한 경우가 많다. 권 교수 역시 이런 이유로 마취과 의사가 됐다.


그는 "마취과 의사는 환자나 보호자로부터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환자는 모두 의식이 없다. 하지만 우리는 500g 미숙아, 자식에게 버림받아 신체 일부가 썩어가는 치매 할머니, 계속된 거부로 병원을 돌다가 실려온 사지가 부서진 외상환자, 손쓸 수 없이 암이 파종됐다고 큰 병원에서 거부당한 암환자 등 수많은 환자들의 마취가 생각난다"고 말했다.


이어 "환자들이 위중한 상태에서 벗어나 정상 바이탈 사인을 회복해 소변이 나오기 시작할 때 우리같은 마취과 의사들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람을 느낀다"고 전했다.


하지만 필수의료인 마취통증의학과는 미국에서 고소득인 것과 달리 국내에서는 기피과로 꼽힌다.


권 교수는 "오랜시간 함께 한 동료 교수들이나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마취를 하겠다고 다짐했던 전공의들이 금전적 이유로 그만두고 개원을 하거나 서울 봉직의로 갈 때 큰 상실감과 슬픔을 느낀다. 지역에서 소중한 의료인을 길러내며 중증마취를 하는 보람으로 산다고 다짐하지만 그래도 기운 빠지는 느낌을 떨치기가 힘들다. 그럴 때는 지역에서 함께 중증외상마취를 하고 있는 충북대병원 신영덕 교수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달랜다"고 말했다.


끝으로 권 교수는 "우리나라도 서서히 변해갈 거라고 생각한다. 마취통증의학과가 중증의료에서의 전문성과 수술실에서의 주도성을 인정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며 "그때는 의학드라마 주인공으로 마취통증의학과 의사가 나올 수도 있겠다"고 소박한 바람을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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