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 의사들이 대거 모여 분노한 현장에 어린 아이들이 등장했다. 생뚱한 풍경은 최근 열린 대한의사협회 임시대의원총회에서 연출됐다.
이번 행사는 날로 척박해지는 진료환경에 대한 개탄이 이어졌다. 민초의사들은 자녀들의 고사리 손을 잡고 행사에 참석해 울분을 토했다.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야 할 주말이지만 투쟁터로 동행할 수 밖에 없는 작금의 상황을 성토했다.
대의원, 방청객, 취재진을 포함해 200여 명이 모인 행사장은 고성과 비방으로 가득찼다. 어린 아이들은 영문도 모른채 격분한 의사 아빠 동료들의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이날 자녀를 대동한 한 참석자는 "아이들에게 험한 꼴을 보여 미안하지만 오죽했으면 이런 곳에 데려왔겠냐"며 통탄했다.
총회 안건은 최근 간호법, 의사면허법 등을 국회 본회의에 직회부한 더불어민주당에 전면 투쟁을 선포하고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자녀를 데리고 방청객으로 참여한 경기도의사회 회원들은 회의 시작 전부터 이필수 의협회장과 집행부를 향해 강도 높은 비난을 쏟아냈다.
이들은 "의사면허법이 큰 문제 없다고 말해왔던 집행부는 사퇴하라", "앞에서는 악법 저지, 뒤에서는 복지부 2중대, 회원 기만 집행부 사퇴"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도 들었다.
회의는 길어졌다. 유튜브 생중계 송출 여부, 기명·무기명 투표 방식 선택 논의부터 안건 투표에 앞선 자유발언, 답답함에 피력하는 의사진행 발언 등 중지를 모으는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토의가 길어지자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다. 방청석에서는 "아이가 7살이다. 우리도 먹고 살고 싶다", "휴일에 아이와 나들이 갈 시간에 이렇게 온 심정을 아느냐"고 호소했다.
또 "후배들을 살려달라", "동네의사 좀 살려달라", "비대위를 당장 구성하라", "수탁검사 시행되면 다 죽는다", "왜 제대로 사과 안하냐", "헛소리 말고 집행부는 사퇴하라"고 소리쳤다.
박성민 대의원회 의장이 수 차례 주의를 주고 '퇴장'을 경고했지만 소란은 지속됐다. 일부 대의원들도 "이게 무슨 민폐냐", "퇴장시키라"라고 언성을 높였다. 그 과정에서 비속어도 나왔다.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어른 의사들의 싸움이 벌어진 셈이다. 싸움판에는 선배도, 후배도, 스승도, 제자도 없었다. 질책과 질타, 원성과 원망만 가득했다.
사실상 의료계 내홍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자리였다. 이날 가결된 비대위 구성 안건도 찬성 99표, 반대 68표, 기권 4표를 기록하며 의견이 엇갈렸다.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 임현택 회장은 "주말에 가족과 함께하지 못하고 저렇게 와서 절규하고 있는 심정을 헤아려 보라"고 말했다.
이어 "소통과 협상을 내세워 품위 있는 의협을 만들겠다던 집행부에 묻는다. 지금 의사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정책이 하나라도 있느냐"고 질책했다.
이 처럼 적나라하게 균열이 드러나고 회장 리더십에 대한 반발까지 터져나온 것은 최근 의료계에 가해지고 있는 전방위적 외압에 기인한다.
수술실 CCTV 설치 의무화법이 오는 9월 시행을 앞두고 있고, 최근에는 야당 주도로 간호법과 의사면허법이 입법 마지막 단계에 놓이게 됐다.
특히 의사면허법의 경우 모든 범죄를 막론하고 금고형 이상을 받으면 의사면허가 취소되는 만큼 의사들 입장에서는 핵폭탄급 법안이다.
여기에 수탁기관이 병원에 검체 검사료 할인을 제공하면 벌점을 부과해 인증이 취소되는 '검체검사 위탁 고시'가 발표됐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법도 속도를 내고 있는 중이다.
한의사 초음파 허용 판결과 의과대학 정원 확대 등 의사들의 공분을 사는 현안들도 산적하다.
무너진 필수의료, 의료전달체계를 바로 세울 파트너인 정치권과 의료계가 손을 잡아도 모자란 시점에서 이들 관계가 걷잡을 수 없이 붕괴하고 있다.
지리산 화엄사에 홍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인 의료계는 혹한의 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