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36주 낙태’ 사건을 계기로 입법 공백 문제가 재점화됐지만 정부나 국회에서는 여전히 법 개정 움직임이 없어 우려를 키우고 있다.
낙태에 대한 처벌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후속 입법에 따른 정확한 가이드라인 등이 제시되지 않아 합법과 불법의 모호한 경계선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2019년 4월 낙태 임신부와 수술을 한 의사 모두 처벌토록 하는 형법상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헌법불합치는 사실상 위헌 취지의 결정이지만 해당 법률을 즉시 무효화할 경우 입법 미비에 따른 큰 혼란이 야기될 것을 우려해 한시적으로 효력을 존속시키는 조치다.
원칙적으로 법률의 위헌성을 확인하는 동시에 정부와 국회에 법 개정을 추진토록 하는 형태다.
하지만 낙태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지 5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하는 모자보건법 제14조 ‘인공임신 중절수술 허용 한계’ 등의 조항은 유지되고 있다.
헌법불합치 결정에 따른 후속 입법 개정 시한이 2020년 12월 31일까지였지만 아직 법 개정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법 개정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법무부는 2020년 11월 의학적으로 인정된 경우 임신 14주까지, 여성을 사회‧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할 우려가 있는 경우 24주까지 허용하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법은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원회에서 한 차례 논의된 것을 끝으로 제21대 국회 회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뿐만 아니라 지난 21대 국회에서 낙태죄 폐지 관련 형법 개정안과 모자보건법 관련 개정안 등 총 7건이 발의됐으나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했다.
이후 제22대 국회가 개원했지만 아직까지 낙태죄 관련해 발의된 법안 개정안은 전무한 상태다.
낙태 허용 범위를 놓고 의료계와 종교계 등 각계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리고 있는 만큼 입법 주체인 국회와 정부 모두 방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입법 공백에 따라 이번에 사회적 논란이 일고 있는 임신 36주 낙태수술 집도의는 모자보건법 위반이 아닌 살인 혐의가 적용됐다.
모자보건법상 24주를 넘어가는 낙태는 불법이지만 복지부는 형법상 낙태죄에 처벌 효력이 없는 점을 고려해 살인 혐의로 수사를 의뢰했다.
한 의료계 인사는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지 5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후속 입법 작업이 이뤄지지 않은 것은 정부와 국회의 방임”이라고 힐난했다.
이어 “앞서 헌법재판소가 태아의 독자 생존 시점 등을 제시한 만큼 이를 토대로 법 개정을 서둘러야 한다”며 “입법공백에 따른 피해자가 더 이상 발생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2019년 헌법불합치 결정 당시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인 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여성의 자기결정권 행사가 충분한 시기의 낙태는 국가가 생명 보호의 수단과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판시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