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바이오 업체들이 미래 먹거리 중 하나인 '신약'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투자에 나서고 있고, 차세대 첨단 전략 산업으로 꼽히는 만큼 제약사들은 물론 대기업 집단에서도 신약 개발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LG 구광모 회장도 신약개발에 인공지능(AI) 활용을 천명하기도 했다. 최근엔 유한양행 국산 신약인 비소세포폐암 치료제(렉라자)가 FDA 허가를 받고 글로벌 성공 사례를 써 나가기 시작하면서 그 가치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삼성그룹과 HD현대그룹이 제약바이오 계열사뿐만 아니라 최근 들어 병원 임상 데이터와 연구 시스템을 활용한 신약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하면서 병원들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편집자주]
삼성그룹과 HD현대그룹이 신수종 사업으로 ‘신약 개발’ 영역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정부의 핵심 육성 첨단 산업 중 하나인 만큼 ‘신약’ 관련 투자 움직임이 빨라지는 모양새다.
두 그룹은 과거 창업주 중심으로 의료 사업에 나선 이래, 최근 신약 개발을 위한 전략 중 하나로 병원을 직접적으로 활용하거나 협력하는 사례를 늘리고 있어 병원들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특히 빅5인 삼성서울병원과 서울아산병원은 모(母) 기업인 두 그룹 차원의 신약 개발 의지에 따라 그 활용도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계열사 간 네트워킹 구축도 빨라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삼성家, 시밀러 넘어 ‘신약 개발’ 속도···삼성서울병원 협력 주목
삼성그룹 오너 일가는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삼성그룹 선대 회장과 더불어 고(故)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모두 오랜 기간 동안 폐암으로 투병 생활을 했다.
때문에 삼성그룹 차원에서 의료사업은 그 자체로 의미가 컸다. 그래선지 삼성그룹은 병원, 의과대학, 보험, 의약품 생산, 바이오시밀러 등 전주기적 사업 벨류체인을 구축해왔다.
실제 이병철 선대 회장은 1968년 종로구에 고려병원(현 강북삼성병원)을 열고, 이후 2대인 이건희 회장이 세계 일류 병원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1994년 강남구에 삼성서울병원을 세웠다.
이후 1996년 성균관대 인수로 의대 부속 삼성창원병원을 포함한 병원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강북삼성, 삼성서울, 삼성창원 등 각각 병원 운영 주체의 경우 재단은 다르게 이뤄져 있지만 삼성의료원이라는 틀 안에 이들 병원은 긴밀한 협력 체계를 형성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CDMO(의약품위탁개발생산) 중심의 삼성바이오로직스를 설립하고, 바이오시밀러 기업 삼성바이오에피스도 출범하며 제약바이오 사업으로 영역을 넓혔다.
특히 최근 들어서 삼성그룹은 삼성바이오에피스 수장이었던 고한승 사장을 삼성그룹 미래사업기획단 단장으로 전격 선임하면서 바이오시밀러를 넘어 신약 개발에 대한 의지도 피력했다.
업계에선 병원 네트워크 등 활용이 더욱 늘 것으로 관측하고 있다. 실제 삼성서울병원은 미래의학연구원 내 ‘혁신신약개발센터’를 통해 다수 바이오 업체와 병원 기반 신약 개발에 나서고 있다.
2011년 출범한 미래의학연구원은 혁신 의료기술 창출을 위해 만들어진 연구소로 정밀의학(유전체 기반 빅데이터), 융합의학(임상 AI), 재생의학(세포치료제) 등 연구 방향성을 기반으로 플랫폼을 구축했다.
미래의학연구원은 삼성서울병원의 의료 역량을 기반으로 국내외 바이오 분야 발전에 기여하며 지속 연구 협력을 통해 혁신적 아이디어가 진료, 신약개발에 연결되는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
현재 삼성서울병원은 2022년 복지부 연구중심병원 육성 R&D사업에서 '희귀·난치질환 첨단 유전자치료제 개발 플랫폼 구축' 과제로 선정돼 삼성바이오에피스 등 15개 기업과 협력 중이다.
병원과 그룹 계열사 간 구체적 협업 내용은 확인되지 않지만 고한승 단장이 수장으로 있는 한국바이오협회와 삼성서울병원이 협력하는 등 신약 개발에서 병원 역할이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삼성서울병원 혁신신약개발센터는 현재 임상지표 예측 알고리즘 개발, 암 중심 유전체-융합형 바이오마커 발굴을 통한 항암신약 개발, 국내외 기업 협업 임상진입 디자인 도출 등을 연구 중이다.
제약업계 한 관계자는“삼성바이오로직스가 자회사 에피스를 통한 신약 진출을 적극 추진하는 만큼 병원을 활용한 시너지도 클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은 그룹 계열사 간 협력도 잦고, 실제 삼성의료원도 삼성바이오에피스 등과 긴밀히 협력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HD현대그룹, 서울아산병원 후보물질 기반 'AMC사이언스' 설립
서울아산병원을 운영하는 아산사회복지재단은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세계 최고 의료수준을 보유할 병원을 만들겠다는 목표로 사재를 출연해 세운 공익재단이다.
서울아산병원은 1989년 ‘서울중앙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 이래 실력 있는 의사들을 모아 의료진을 구성했고, 복지 사업과 지속 투자를 통해 명실상부 국내 최고 병원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 동안 서울아산병원은 ‘우리 사회의 가장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취지에 맞춰 그동안 모기업인 HD현대가 병원 연구역량을 활용해 직접적으로 사업에 나서진 않았다.
하지만 정기선 HD현대 수석부회장은 성장동력으로 ‘바이오’를 꼽는 등 시장에 관심을 드러내오다가 최근 서울아산병원 기반 신약 개발 자회사를 설립하면서 바이오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실제로 지난해 말 HD현대 중간지주사 HD한국조선해양은 의·약학 연구개발업 중심 자회사 ‘AMC사이언스’를 설립했다. 초대 이사회는 HD현대그룹 중심의 사내이사 3인으로 꾸려졌다.
이 회사는 서울아산병원 연구조직인 아산생명과학연구원에서 개발 중이던 신약 후보물질, 세포치료제, 의료기기 등 연구 자원을 기술이전 등 전(全) 세계로 확장할 계획이다.
지난달 박성욱 아산의료원장 공동대표를 선임한 데 이어 박승일 서울아산병원장도 사내이사로 신규 임명, HD현대그룹과 서울아산병원 협력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사외이사에 조유숙 서울아산병원 신약개발지원센터 소장(알레르기내과 교수)과 이관순 지아이디파트너스 대표(前 한미약품 대표)를 앉히는 등 전문가 선임도 눈길을 끈다.
특히 AMC사이언스의 AMC(Asan Medical Center)는 서울아산병원 영어 약자로, 서울아산병원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의료기관이기에 글로벌 시장에서 더욱 활용 가치가 크다는 평가가 나온다.
현재 서울아산병원은 주요 암, 난치성 질환 등 신약을 효율적이고 빠르게 개발할 수 있도록 AI 기반 개방형 플랫폼을 구축해 나가고 있고, 기존에 없던 신약 타깃물질 연구 등을 진행 중이다.
서울아산병원 관계자는 “AMC사이언스는 병원이 갖고 있는 신약 후보물질 등을 이전하는 데 역할을 가진 개념”이라며 “근본적으로 서울아산병원 기술에 기반한 글로벌 확장에 도움을 주고 그 과정에서 로열티 계약 등의 방식이 정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